지난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예상대로 0.5% 포인트 인상했다. 돈을 빌려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출로 연명하고 있는 자영업자들도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제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금리를 올리는 이유는 한은 총재가 솔직히 밝힌 바와 같이 미국이 금리를 계속 인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은 저 멀리 미국에 가 있다. 일부는 경기 침체나 금융시스템 붕괴 가능성을 거론하며 미국의 정책방향 전환을 고대하고 있지만,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인플레이션이 잡힐 때까지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니 앞으로도 상당 기간 미국발 고금리의 고통은 계속될 듯싶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내실을 다지며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정책도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임기응변식이나 인기에 영합하는 얄팍한 정책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연결될 수 있다. 최근 세계 금융시장을 보노라면 최고 기업이나 선진국을 막론하고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살얼음판이다.
부도 위기 직면 크레디트스위스 은행
지난 9월 말 세계적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의 주가가 10% 급락하는 등 부도 위기에 몰렸다. 신임 최고경영자(CEO)가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이 도화선이 됐다. 그간 불투명한 거래로 은행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CEO 스스로 회사가 긴박한 상황이라고 간접 시인한 꼴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은행은 2014년에 고객의 탈세를 도운 혐의로 미국 정부로부터 벌금을 처분받은 이래 범죄자금 세탁, 뇌물, 부패 정치인과의 연계 등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돈 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를 제어해야 하는 내부 리스크 관리가 작동되지 않았다.
특히 작년에는 거래하던 헤지펀드(아케고스)가 전격 파산해 7조원에 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이 헤지펀드가 매우 위험한 레버리지 투자(증거금의 몇 배에 달하는 투자)를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높은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는 욕심에 이를 묵인하다가 거액이 물린 것이다. 경제 여건도 어렵고 리스크 관리도 안 되는데 CEO까지 가벼이 처신하니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 뉴스가 세계 투자자의 이목을 끌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은행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과정과 닮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때처럼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들이 수익 앞에서 원칙을 저버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레버리지 투자나 이름도 생소한 파생금융기법이 난무하고 있다. 더구나 현 상황은 급속하게 오르는 금리로 인해 전 세계 경제 환경이 민감할 대로 민감해져 있다. 이러다가는 그저 고개가 갸웃거릴 정도의 정책에 대해서도 시장이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가 현실화됐다.
위기 직전의 영국
크레디트스위스 은행의 소동이 있기 1주일 전에 영국 파운드화가 급락했다. 이번에도 새로 취임한 총리로부터 시작됐다. 재원 마련 계획 없이 국민들에게 에너지 보조금(약 100조원)을 지원하고 세금을 깎아주겠다(약 70조원)고 한 발표가 화근이 된 것이다. 시장에서는 영국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이를 충당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봤다. 국채 발행이 늘면 국채 가격이 하락할 것이므로 사람들은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채 가격은 당연히 하락했는데(국채금리 상승), 그 정도가 문제였다. 급기야 연기금도 매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다. 연기금들은 수익률 극대화를 위해 레버리지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채권 가격이 급락하자 증거금을 더 쌓지 않으면 반대매매를 하겠다는 통보, 즉 마진콜(margin call)을 받게 된 것이었다. 국민들이 애써 모은 연금과 기금이 휴지조각이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영국의 국채금리는 유럽의 병자로 취급받는 그리스와 이탈리아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 버렸고, 국채와 거의 같은 성격인 영국 돈도 신뢰가 무너지며 환율이 급락했다. 외환위기가 눈앞에 어른거리자 영국 중앙은행이 무제한 국채 매입에 나서면서 상황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총리의 감세 정책 고수와 중앙은행 총재의 국채 매입 중단 발언 등이 오가면서 위기감은 계속 고조됐고, 드디어는 지난주 금요일에 총리가 재무장관을 경질하며 감세 정책을 철회했다. 감세를 통해 기업가 정신을 살리고 경제위기를 벗어나겠다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장의 압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전 세계가 물가가 문제라는데 혼자 반대편의 성장을 향해 뛰어간 격이니 방향감각 제로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정책만 좇는 포퓰리즘에 매몰돼 있었기에 이런 상황을 보지 못했다. 사실 영국은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결정한 2016년부터 경제적 무력감이 쌓여갔다. 과거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지키느라 EU라는 거대 시장이자 값싼 원자재 공급처를 버린 결과였다. 북해유전을 보유한 산유국이면서도 무역적자가 늘어나고, 물가상승률이 10%를 넘나드는 심각한 상황이 계속됐다. 영국은 1970년대 중반과 1990년대 초반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등 수모를 겪었는데도 그 교훈을 잊어버렸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않아 또다시 소를 잃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경제 규모 세계 5위의 강대국 영국이라고 하더라도 위기가 다시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만일 영국이 부도가 나면 세계 경제는 더욱 불안해질 것이다. 전염효과(contagion effect)라고 해서 부도난 국가와 비슷한 환경의 나라로 위기가 전이된 사례가 너무나 많은데, 현재 여기서 자유로울 나라는 몇 없다. 기초체력(펀더멘털)이 무너진 줄 모르고, 자기가 선진국이라고 혹은 초일류 기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곳은 특히 더 위험하다. 지금은 정공법의 신중한 자세가 필요한 시기다.
LUX경제그룹대표·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