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콘텐츠는 20~30년 뒤 그들이 어른이 됐을 때를 생각하고 만들어야 한다. 당장 성과를 수확할 수 있는 콘텐츠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착실하게 씨앗을 뿌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일본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 총괄 프로듀서 와시오 타카시(57) 이사가 지난 8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토에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은 ‘슬램덩크’ ‘드래곤볼’ ‘원피스’ ‘소년탐정 김전일’ ‘엉덩이 탐정’ ‘프리큐어’ 등을 만들었다. 와시오 이사는 이날 오후 부산 벡스코 제2전시장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 콘텐츠&필름 마켓 콘퍼펀스에 참여해 K콘텐츠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동반 성공 및 시너지 창출을 위한 전략을 발표했다.
24년 전 토에이에 입사한 와시오 이사는 ‘프리큐어’ 원작을 기획한 토에이의 4대 ‘히트 프로듀서’ 중 한 명이다. ‘프리큐어’ 원작 지적재산권(IP)만으로 지금까지 2400억원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귀여운 여자 아이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워나가는 내용을 그린 ‘프리큐어’는 여자 아이들이 늘 보호받는 존재로 그려지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는 “‘드래곤볼’ 감독인 니시오 다이스케와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 없는 걸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 당시 여자 아이들은 항상 보호받는 존재로 그려졌지만 우리는 그들이 자기 의지로 결정하고, 스스로를 지키고 싸워나가는 주체로 만들었다”며 “‘내 다리로 일어선다’는 작품의 테마는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남녀가 평등한 지금 사회를 보면서 20년 전에 우리가 그리던 좋은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와시오 이사는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재 상황에 대해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어린이 콘텐츠 자체가 많이 줄었고 업계가 다음 세대를 위한 밑작업을 해놓지 않았다는 점, 작업해놓은 씨앗을 잘 육성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기감을 느낀다. 업계의 시야가 좁아진 것”이라며 “일본은 과거 콘텐츠 시장에서 앞서나갔지만 당시 국내 시장으로 충분했다. 인구가 많고 소비력이 좋아 해외로 확장시키는 글로벌 네트워크가 필요하지 않았다. 네트워크와 여러 가지 플랫폼을 활용해 확장해 나가는 데 지금은 한국이 한 수 앞”이라고 말했다.
트랜스미디어는 요즘 콘텐츠 업계의 주요 이슈다. 성공한 원작을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확장시킬 수 있지만,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와시오 이사는 “원작이 아무리 좋아도 작품을 이해하고 가장 멋진 부분이 뭔지 연구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며 “작품의 뿌리, 맥을 잘 짚어야 한다. 화려한 그림과 색채를 더하며 여러가지 아이디어와 방향성 가운데서 헤매게 될 때 돌아갈 수 있는 원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게 작품의 뿌리”라고 말했다.
콘텐츠 시장의 변화 속도는 빠르다. 애니메이션 업계도 마찬가지다. 와시오 이사는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애니메이션은 아이들, 또는 일부 마니아층의 성인이 보는 장르였고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콘텐츠가 아니었다. 그 때 뿌린 걸 지금 수확하고 있다”며 “지금은 씨앗 뿌리기와 수확을 동시에 같이 해야 하는 시기다. 다음 세대 어른이 될 아이들을 위해 씨앗을 뿌리면서 이미 성장한 어른들에겐 더 즐겁고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에이는 지난해 CJ ENM와 손잡고 드라마와 영화, 애니메이션을 오가는 트랜스미디어 콘텐츠 개발에 나섰다. 그 이유에 대해 와시오 이사는 “한국 드라마는 충격적이다.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에 깜짝 놀랐다”면서 “CJ ENM과 손잡으면 내가 그 작품들을 보며 느낀 감동을 같이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K콘텐츠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더하면 새로운 글로벌 기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CJ ENM과 일하면서 한국 기업들에 대해 여러 가지 면에서 놀랐다고 그는 말했다. 와시오 이사는 “만든 콘텐츠를 세계에 전파하는 능력이 엄청나다. 일본 회사들에 비해 네트워킹이 굉장히 잘 된다”며 “CJ ENM과 같이 작품을 만들면 분명히 좋은 작품이 빠른 시간에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세계인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드라마와 영화를 만드는 기술이 최고다. 이들과 함께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는 ‘뽀로로’와 ‘핑크퐁’ 등 한국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미래를 밝게 전망했다. 와시오 이사는 “어린이 콘텐츠는 최소 10년은 돼야 어른들이 알아챈다. 3년 정도 되면 아이를 둔 엄마 정도만 알지만 그다음 아빠가 알게 되고 아빠가 회사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산업적으로 확장된다”며 “‘핑크퐁’과 ‘뽀로로’는 이제부터 진면목을 나타낼 거다. 일본에서 5년 전 방영이 시작된 ‘엉덩이 탐정’은 아직 수확의 때를 기다려야 하지만 ‘포켓몬스터’의 경우 20년 된 IP”라고 비교했다.
이날 CJ ENM의 자회사 블라드스튜디오는 실사 시리즈와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동시 개발 중인 소설 원작 기반 ‘설화 유물 보존과’(가제), ‘프리큐어’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실사 시리즈로 기획 중인 판타지물 ‘슈퍼 걸즈’(가제) 등 토에이와 공동 개발 중인 IP들을 공개했다.
부산=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