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금요일의 문장

입력 2022-10-13 19:00

여름 산책은 길어졌습니다

죽은 화분들이 동그랗게 앉아 있습니다
테이블은 창가를 생각합니다
골목을 지나가는 족제비 이름을 부르면
붉은 꼬리라도 생길까요

더 어둬질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오래 펼쳐진 잠과 얼룩들은 소나기에 젖은 책처럼 부풀고
창문이 만져지는 구름은
그러나 보이지를 않는군요
물 항아리처럼 출렁이는 오후를 멀리서 그냥 듣기만 할 거예요

난 고작 빈 병 같아서
자주색 달개비의 새끼발가락 하나 뜯어 꽂아 둘 뿐이니까요

최대한 많은 이름을 여름에 빌려주고 싶었지만
아주 간절해지는 것들은 때로 지루해져
구두를 벗습니다
책장에서 여름의 목록을 정리하고
저녁이 내리는 오후의 테이블은 이제 낭독회를 열 준비를 합니다
금요일입니다

오늘은 마지막 페이지 한 문장에서 미열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신이 두고 간 책장 사이에서
수많은 글자들을 뽑아 붉은 혀끝에 올려놓겠지요

아무래도 그대로인 오늘은 당신과의 만남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정정화 시집 '알바니아 의자' 중

어떤 시는 “산뜻하고 이채로운 언어들”(문정희 시인)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여름날의 산책을 묘사한 이 시야말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