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이 글은 자서전입니까

입력 2022-10-14 04:02

함께 사진 한 장 찍지 않은 것이 이렇게 섭섭하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아니 에르노와 서울 인사동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1995년이었다.

내가 편집을 담당했던 문예지는 계절마다 국내 작가와 해외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특집을 꾸렸다. 1995년 봄 호 편집은 내게 좀 각별했다. 황순원 작가와 에르노 작가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황 작가를 직접 만나 사진 자료 등을 챙겼다. 떨리는 마음이었다. 더구나 해외 특집 작가인 에르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정신이 혼미했다. 짧은 기간 내에 사고 없이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직업정신 이상으로 먼 곳에서 방한한 작가를 잘 대접하고 싶다는 욕심이 일었다. 당시 에르노의 작품은 한국에 한 권도 번역돼 있지 않았다. 그저 프랑스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가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지 몇 년 안 된 불문학자 이재룡 선생이 에르노의 작품을 국내에 제대로 알리고 싶어했다. 한식집에서 만난 에르노는 긴장을 놓지 않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오십을 넘긴 사람 특유의 다소 편안한 여유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몸짓과 품위 있는 어투는 방 안의 공기를 쨍하게 만들었다. 에르노와 이 선생의 대화는 상당히 논쟁적이었다. 내밀한 연애의 상실감을 그린 선정적 작품으로 프랑스 독서계의 열광과 악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단순한 열정’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에르노는 그 자리에서 십대 청소년뿐 아니라 나이 든 아저씨 독자도 자신의 심정을 글로 표현해줘 고맙다는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다. ‘말과 글을 소유하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상처를 표현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일 것’이라고 훗날 이 선생은 기록을 남겼다.

지극히 사적인 체험담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 되는가. 겪는 것만 쓰겠다는 작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문학이 될 수 있는가. 에르노를 둘러싼 호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갈린다.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쓰이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테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솔직하게 이 글을 쓸 수가 있다.” 소설 ‘단순한 열정’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허구로 만든 이야기가 소설이라고 인식한 사람에게 에르노의 작품은 당혹스럽다. 작가 스스로 ‘밋밋한 글쓰기’라고 명명한 문체는 어떤 순간도 사건화하지 않고 담담하게 상황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일을 왜 글을 통해 노출하는가. 소설 속 화자는 답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에르노에게 사적인 삶의 기록은 시간을 두고 독자에게 도착한다. 작가를 관통한 그 시간, 그 세상은 다른 사람의 어긋나고 잃어버린 인생을 함께 엮는 힘이 있다.

화자는 “이 글은 자서전입니까” 하는 유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움을 예견한다. “열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감정들이다. 그것은 출판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세인들의 ‘정상적인’ 가치 기준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모든 책이 출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위가 아닐까?” 자서전인가 소설인가의 경계를 넘어서고 날것 그대로 인간의 마음을 파헤친 문학을 해온 덕분에 에르노는 오늘 새롭게 조명된다.

‘개인적 기억의 뿌리, 소외, 집단적 구속을 밝히는 용기와 예리함’은 노벨상위원회가 밝힌 수상 이유다. 에르노에게 문학은 노출증이 아닌 용기였다. 우리는 그 용기에 힘입어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바라본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