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개 들이 생수 페트병 비닐 팩에서 한 개를 빼고 다섯 개를 배낭에 넣었다. 물 10ℓ의 무게는 곧 10㎏이다. 허리를 곧추세우기 힘들 정도로 육중한 느낌이 어깨를 짓누른다. 이걸 들고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남쪽 평화의 공원 앞에 섰다. 10ℓ의 물을 들고 6㎞를 달리는 월드비전의 ‘글로벌 6K 포 워터’(글로벌 6K·Global 6K for Water)를 체험해보기 위해서다.
6㎞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아이들이 매일 물을 얻기 위해 걷는 평균 거리다. 이들의 목마름에 공감하고 식수 위생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이 글로벌 6K다. 서울에선 오는 22일 월드비전 주최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평화의 공원에서 시작해 에너지드림센터를 거쳐 하늘공원 외곽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 다시 평화의 공원 평화 광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예정돼 있다. 비 갠 오후 홀로 이 코스에 도전했다.
하늘공원 북쪽 2㎞ 지점을 지날 때부터 뛰는 것을 포기하고 걷기로 대체했다. 무릎 관절의 삐거덕거림과 발바닥의 불붙는 듯한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여름 내내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다가 간신히 회복한 상태여서 달리려야 달릴 수가 없었다. 어깻죽지로 파고드는 물의 무게가 아프리카 아이들의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문득 지난 7월 아프리카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 인근 치서카라 마을에서 접한 엄마 빅토리아(65)와 아들 이사(11)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기자가 속한 월드비전 밀알의 기적 모니터링팀은 식수 없는 마을인 치서카라 빌리지를 방문했다. 무려 아홉 아이를 키우는 엄마 빅토리아와 열한 살 아들 이사는 매일, 그저 생존을 위해 엄마는 20ℓ, 아들은 5ℓ짜리 물통을 들고 길을 나선다. 집에서 걸어서 한참 걸리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한 이후에 뿌연 웅덩이에 도착한다. 소를 비롯한 야생 동물이 사람과 함께 목을 축이고, 뱀과 개구리가 있는 수풀 속 웅덩이에서 엄마는 20ℓ 아들은 5ℓ의 물을 채운다. 끓여서 마신다고는 해도 괜찮을지 무척 걱정되는 이 물이 이들 가족에겐 생명줄이다. 아들 이사에게 언제 물을 뜨러 오느냐고 묻자 “점심을 먹고 난 후”라고 답했다. 이유를 묻자 “점심을 먹은 후가 가장 힘이 있을 때라서”라고 말했다. 물을 떠 오는 일 자체가 중노동이다.
글로벌 6K는 말 그대로 글로벌 캠페인이다. 2014년 월드비전 미국에서 처음 시작돼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 세계 30개국에서 함께했다. 급수대 없이 러너가 마실 물을 직접 들고 번호표에 인쇄된 아이를 생각하며 달리는 레이스다. 일정 금액의 참가비를 내면 달리기용품을 전달받는데, 참가비 대부분은 아프리카 식수 개선 사업에 쓰인다. 한국에선 2018년 처음 시작됐고 지난해까지 5만7000여명이 참가해 총 13억5487만원을 기부했다. 이로 인해 케냐 오실리기, 에티오피아 에레모레나 에너, 모잠비크 도무에, 가나 크라치웨스트 일대에 식수시설이 새로 들어섰다. 올해 모이는 후원금은 우간다 마유게 마을로 향할 예정이다.
사람들이 모이지 못했던 코로나 암흑기에도 글로벌 6K는 면면히 이어져 왔다. ‘따로 또 같이’ 형태로 온라인을 통해 6㎞를 완수한 흔적을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자가격리를 해야 했던 한 참가자는 자신의 단독주택 옥상에서 왕복 달리기로 6㎞를 완주했고, 수영을 좋아하는 참가자는 수영장에서, 피트니스에 관심 있던 사람은 운동센터의 로잉머신에 올라 6㎞ 거리를 인증했다. 서기준 월드비전 과장은 “러닝이나 하이킹같이 내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에 도전하면서 기부도 할 수 있다는 점이 밀레니얼 세대들의 시선을 끌었다”면서 “더 즐겁고 더 재밌게 기부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반기엔 러닝이 진행되지만 상반기엔 하이킹이 진행됐다. 지난 5~6월 월드비전은 글로벌 6K의 산악 버전인 하이킹을 진행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감안해 단체 행사는 인원을 제한해 진행하고 대부분은 개인 행사로 안내했다. 개도국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전하겠다는 소망을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300대 산 중 한 곳의 정상에 올라 개별적으로 응원 메시지를 적은 월드비전 손수건을 펼쳐 들고 사진을 찍어 SNS에 자유롭게 인증하는 방식이었다.
제한적으로 모인 스페셜 하이킹은 아웃도어 큐레이터 이원창씨와 함께하는 낙산 산책, 하이킹 에반젤리스트 김섬주씨와 함께하는 설악산 등반, 월드비전 이현근 과장과 함께한 북한산 초급 하이킹, 운동하는 아나운서 박지혜씨와 함께하는 사패산 ‘쓰줍’(쓰레기를 줍는) 하이킹, 사진작가 백경록씨와 함께하는 검단산 스냅 하이킹 등으로 이어졌다.
올해 설악산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스페셜 하이킹에 도전한 권영신씨는 “좋아하는 등산이라는 취미를 통해 건강을 챙길 뿐만 아니라 기부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며 “정상석에서 손수건을 펼치고 인증샷을 찍으면 다른 등산객들의 눈길을 끄는데, 그럴 때마다 글로벌 6K의 의미와 취지를 열심히 설명한다”고 밝혔다. 등산 커플 정유빈 김찬연씨도 월드비전에 보내온 후기에서 “산에 오르며 숨이 차오를 때마다 물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면서 “지구 반대편 아이들에게 물을 선물할 수 있어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다시 상암동 글로벌 6K 걷기 체험이다. 언덕 위 마포자원회수 시설 고개를 지나 한강이 보이는 하늘공원 남쪽 메타세쿼이아 숲길에 들어서자 그림 같은 풍경이 잠시 고통을 잊게 한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실제 걷는 길은 우리처럼 잘 포장된 아스팔트도, 정성 들인 잔디도 아니다. 비가 오면 진창으로 변하고, 치안 부재로 물을 뜨러 다니다 몹쓸 짓을 당하고, 가족을 위해 물을 떠 와야 하기에 대신 학교에 갈 수 없는 눈물과 고난의 길이다.
사람이 하루 생존에 꼭 필요한 물은 7ℓ, 위생 등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량은 20ℓ이다. 식수 시설이 없는 아프리카 마을의 아이들은 아직도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반면 물이 풍부한 한국에선 양치질하며 물을 틀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짧은 순간에 6ℓ의 물이 흘러내려 간다고 한다. 10분간 샤워엔 무려 120ℓ의 물이 필요하다. 글로벌 6K 골인 지점인 상암동 평화 광장 앞엔 난지연못이란 드넓은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호수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우리가 깨끗한 물을 마음껏 쓸 수 있기 때문이란 점을 깨달았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목마름에 공감하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