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듣는 팟캐스트가 있다. 주식시장을 다루는 방송이지만 경제 전반의 배경이 되는 국제 상황, 전기차나 소재 같은 신기술 동향, 지리, 역사 등 다루는 분야는 경계가 없다. 게다가 적당한 분량으로 구성돼 운동할 때나 막히는 차 안에서 공중파 방송보다 더 많이 듣게 된다. 성실하고 부지런해서 하루에도 몇 개의 에피소드를 올리고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다. 진행자나 게스트들의 입담이 어찌나 좋은지 받아 적기만 해도 한 권 책이 될 듯하다.
드물지만 실망하는 일도 있다. 출연하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를 넘어서 정확지 않은 사실을 전할 때다. 얼마 전 도시 형태에 대한 경제학자의 해설이 그랬다. 땅이 한정돼 있고 기술이 충분히 발달해 있는데 도시를 초고층으로 짓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규제를 원망하는 내용이었다. 도시에 대한 일반의 전형적 인식이며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지만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과연 건축가들은 ‘초원 위 마천루’를 상상도 못 해봤을까? 그들은 간단한 산수도 못 하는 바보들이었을까? 비좁고 불결한 도시의 건물들을 모두 모아 고층으로 짓고 나머지 땅을 녹지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이미 백 년도 전에 시작됐고 실현이 되기도 했다. 이른바 ‘빛나는 도시’ 계획이다. 2차 대전 이후 복구가 절실했던 유럽과 아시아 신생국가 도시가 주된 실험 대상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초원 위 마천루로 이뤄진 ‘빛나는 도시’는 자동차가 중심이 되는 공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거리에 걷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도로는 정체가 이어졌다. 걷는 이가 없으니 이웃과 교류할 기회도 없고 공동체가 무너졌다. 이내 마천루는 빠르게 슬럼화됐고 조감도에서 빛나던 초원은 황폐해졌다. 범죄율이 치솟고 우범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빛나는 도시’ 아이디어는 폐기된다. 대신에 전통적 도시의 ‘저층고밀’ 공간, 즉 낮은 건물이 빡빡하게 들어찬 도심이 사람 중심이며 공동체를 회복하고 친환경적이며 지속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전후에 건설된 변두리 고층 아파트 단지가 슬럼화되고 전통적 저층 도심이 고급 주거로 살아남은 프랑스 파리가 좋은 예다.
건축과 도시는 인문학, 공학, 의학처럼 고도의 전문 분야지만 모두가 강력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모름지기 전문가란 일반이 알지 못하는 정보와 지식이 있고 이 비대칭성에서 권위가 시작하는데 건축과 도시는 비대칭성이 매우 희박하다. 취향과 지식이 혼재되고 부동산과 혼동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도시 삶이 초원 위 마천루에서 펼쳐지리라는 상상은 근거가 없다. 기원을 차분히 따져보자면 심오한 독서나 경험보다는 유아적 상상력이 전부다. 기껏해야 우주소년 아톰이나 마징가 제트 같은 어렸을 적 봤던 만화 정도다.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고 등교하고 장을 보고, 이웃이라고는 쇼핑몰이나 교회에서 만나는 미국 드라마가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피상적 이미지가 내면화되고 공고해져서 신념화된 아마추어적 전문성을 형성하고 있다면 경계할 일이다.
정작 문제는 도시 행정이다. 팟캐스트야 사적 방송이라지만 도시 행정을 책임지는 주체들이 문외한들과 다를 바 없는 유아적 시각으로 도시의 미래를 만들고 있다면 이는 비극이다. 서울 세운상가를 헐어내고 초원 위 마천루를 짓겠다고 한다. 용산 정비창 개발도 초원 위 마천루다. 변두리 신도시도 아파트 재건축도 마찬가지다. 무지와 빈곤한 상상력으로 만드는 도시에서 도로는 막히고 이웃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은 더욱 고립될 뿐이다.
하염없이 막히는 강남 도로 차 안에 앉아 팟캐스트를 들으며 초원 위 마천루 신화의 저주가 시작된 건 아닌지 걱정된다. 침체한 내수 경제, 교육 문제, 저출산 현상도 모두 같은 연원과 해결책이라고 생각을 넓히다 흠칫 놀라며 멈춘다. 팟캐스트 경제학자와 같은 실수일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찰스 다윈의 경구가 떠오른다. “무지는 지식보다 더 확신하게 한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