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비움의 힘, 송현동

입력 2022-10-05 04:06

주중엔 서울 양천구를, 주말엔 동네를 걷는다. 덕분에 공유지인 길과 공원과 산과 강을 속속들이 꿴다. 동네에선 북촌-청와대-서촌-경복궁이 기본 코스인데 최근 송현동이 추가됐다. 오는 금요일(7일) 시민 개방을 앞두고 지난주 송현동 부지(3만7117㎡)의 가림막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송현 열린녹지광장’으로 이름 붙인 이곳은 1920년 일제 식민자본인 조선식산은행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지 102년 만에 시민 품으로 되돌아온다.

송현(松峴)은 말 그대로 경복궁 동쪽의 소나무 언덕이라 ‘솔재’로 불렸다.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밥을 짓고 구들을 달궜던 조선 500년간 도심 한가운데에 이처럼 소나무 숲이 유지된 건, 이곳이 권력 최상층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년 이후 외척과 세도가의 차지였는데 광해군의 장인이나 청송심씨였던 영의정 심상규, 안동김씨였던 김병주와 김석진 등을 거쳐 1912년쯤부터 순종의 장인인 친일파 윤택영이 살았다. 1920년 윤택영이 은행 빚에 쫓겨 중국으로 도망가면서 땅은 식산은행에 넘겨졌고, 3년간 공사 끝에 고급 직원 사택이 됐다. 광복 후 적산으로 몰수돼 미군 장교 숙소와 미 대사관 직원 숙소로 오래 활용됐다. 1997년 삼성생명이 매입해 미술관 등을 지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2008년 대한항공이 인수한 뒤 시도한 7성급 한옥호텔, K팝 공연장도 좌초됐다. 결국 서울시가 작년 8월 인수해 일부 부지(9787㎡)에 ‘이건희 기증관’을 건립하기로 같은 해 11월 정부와 합의한 뒤 임시 개방을 준비해 왔다.

높직한 4m 돌담만 기억되던 공간 안쪽엔 서울 도심에 전무한 드넓은 대지가 숨어 있다. 임시 개방인 만큼 최소 예산으로 조성된 1만㎡ 중앙 잔디광장과 주위 야트막한 꽃밭, 그리고 이를 가로지른 8개 진출입로만 있어 언뜻 보면 빈터에 가깝다. 하지만 이 비움의 힘은 강력해 최상층의 공간이 최고 주권자인 시민 공간으로 변모하는 시대적 흐름을 이끈다.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