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때와 ‘겉’은 같고 ‘속’은 다르다지만… “곳곳 뇌관 악재”

입력 2022-10-04 00:04

한국 경제가 또다시 위기설에 휩싸였다.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훌쩍 넘었고, 물가는 고공행진 중이다. 무역수지는 적자의 늪에 빠졌고 경기 둔화 조짐도 포착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경제위기가 터질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환율·고물가·무역적자 관련 최근 경제지표는 앞선 경제 위기 때와 흡사하다. 가장 먼저 두 번의 경제위기를 제외하고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기록은 찾기 어렵다. 1997년 12월 환율이 처음으로 1400원을 돌파하더니 같은 달 말에는 1995원을 찍었다. 그 후 약 9개월 동안 환율은 1400원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금융위기가 확산되던 2009년 3월에도 환율은 한때 1597원까지 치솟았다. 당시 약 5개월간 환율은 1400원 이상에서 움직였다.


물가 상승률이 두 달 연속 6% 이상을 기록한 것도 1998년 10월(7.2%)~11월(6.8%) 이후 처음이다. 6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도 25년 만이다. 당시 무역수지 적자는 1995년 1월부터 1997년 5월까지 29개월간 이어졌다.


정부는 과거 위기와 비교했을 때 국내 외환보유액 등 대외건전성이나 유동성 지표가 양호해 경제위기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곳곳에서 위기 징후가 포착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긴장 태세를 늦춰서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과거 경제위기가 국내 주력 산업들이 약화하는 시기, 미국의 금리 인상 시기와 겹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도체가 다운사이클(장기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한국 경제는 위기를 맞곤 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1년 전보다 5.7% 줄며 두 달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반도체 등 주력 산업의 수출이 주춤하고, 대중국 수출 감소세도 이어지며 수출 증가율은 지난 6월부터 한 자릿수로 내려앉았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3일 “고환율 상황에서 한·미 금리 차이가 겹치면 자본 유출의 위험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한국만의 대내적인 ‘뇌관’도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가계·기업 등 민간부문 부채, 부동산 버블, 노동시장의 경직성 등이 대표적이다. 김 교수는 “대외적인 문제가 장기 지속되면서 뇌관이 터지는 등 ‘위기의 트리거’가 발생하면 단번에 경제위기로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여전히 심각한 대형 경제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입장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참석차 방문한 필리핀 마닐라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에서 경제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는 게 외부의 시각”이라고 말했다.

과거 위기 때와 비교해 지표들의 ‘속모습’이 다르다고 정부는 강조한다. 외환위기 때는 국내 경제의 구조적 부실에 국가신용등급 하락이 충격을 줬다. 단기외채 비율 역시 1997년 657.9%, 2008년 79.3%로 높았지만 올 2분기 말 기준으로 이 지표는 41.9%로 양호한 수준이다. 최근 무역수지 적자행진 상황에서도 경상수지는 아직 흑자를 유지하고 있는 점도 다른 점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국회에 제출한 현안 보고서에서 “최근 환율 상승은 미국의 긴축 강화, 글로벌 달러 강세라는 대외 요인에 주요 기인하며 우리나라 대내외 건전성이 양호하다는 점에서 과거 두 차례 위기와 다르다”고 평가했다.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외부에서 충격이 왔을 때 견뎌낼 힘이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일단 정부가 환율 안정에 정책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환율을 잘 방어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팬데믹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라며 “외국에서 차입을 해올 때 인센티브를 주는 등 향후 3~4개월은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한·미 통화스와프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그 자체로 시장이 안정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 안정화에 상당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내 리스크 관리에 선제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지금처럼 경기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금융건전성을 강화해두는 것이 중요하다”며 “코로나19 경제위기가 많이 해소된 국면이지만, 원리금 상환 유예 조치 등 정상화는 느린 상황”이라고 밝혔다.

세종=신재희 권민지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