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서 화장실 청소도 좀 하고, 언제까지 엄마가 네 운동화를 빨아야 하니.” 주말 아침마다 닫힌 방문 너머로 들려오던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 고3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달콤한 잠기운에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명절 때마다 반복해서 방송되던 철 지난 히트 영화의 대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곧이어 들려올 대사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아이고 냅둬요. 나중에 지가 살림하고 결혼하고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되는데, 뭐 하러 지금부터 일을 시킨담. 그냥 공부나 해!”
아버지는 호시탐탐 내 손에 고무장갑을 끼우고 집안일을 하게 만들려 했으나 그때마다 엄마가 나타났다. “아이고, 냅둬요. 그냥 당신이 좀 해요!” 그러면 아버지는 또 거절하는 법 없이 엄마가 건네는 고무장갑을 받아들고 혀를 끌끌 차며 화장실로 사라지셨다.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말 그대로 한 달에 한 번씩, 일 년 열두 달 제사상을 차려내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나와 남동생을 키우셨다. 아버지는 다섯 남매의 장남이자 경상도 남자지만 ‘밥줘, 아는? 자자’로 대표되는 가부장주의의 울타리 안에 가족을 가두지 않으셨다. 집안일은 ‘엄마의 일’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일이었다. 아버지 스스로 주말이면 청소를 도맡아 하거나, 나와 남동생 구별 없이 집안일을 나누려 하셨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오히려 내게 돌아오는 일을 막아서 아버지나 남동생에게 시키셨다.
나는 아이가 없다. 결혼 제도, 그리고 육아와 출산 문제에서 자유롭게 삶을 보내고 있다. 하고 있는 일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결혼과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는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나 생애 주요 주기를 통과하고 있어서인지, 친구들 역시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동의하에 아이 없이 지내는 커플도 많다. 얼마 전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키우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에 미안하다’란 이야기를 듣고 내심 놀랐던 기억이 있다. 연일 보도되는 ‘대한민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출산율 최저’라는 기사를 그저 흘려들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무신경한 사람들 때문인지 한국 출산율의 심각성은 사실 우리보다 해외에서 더 우려를 표한다. 한국의 유별난 사교육과 우리말을 그대로 살린 표기인 ‘hagwons(학원)’을 그 이유로 꼽지만, 사실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는 여전히 불평등한 ‘가사노동’ 때문이다. 특히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4.4배나 더 많은 시간을 무급 노동인 집안일에 쓰는데, 이는 OECD 국가 중 일본과 튀르키예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70년대 가사노동 임금을 주장한 대표적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학자인 실비아 페데리치는 여성의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사를 다룬 ‘혁명의 영점’이라는 논문에서 소외된 여성의 가사노동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와 사회가 유지되도록 필수적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사노동은 산업화 시대 부계사회에서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부불노동(unpaid work)’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 등 여성들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여성의 일자리로 자리하면서 급여가 주어지지만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는 일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가 그저 집안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 여성주의자가 된 뒤에는 어머니가 투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노동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깃들어 있었는지를 깨닫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 노동을 당연시하고 절대로 자신만의 돈을 따로 챙기는 일이 없었으며, 한 푼이라도 쓸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아버지에게 의존해야 했던 역사 속에는 얼마나 큰 희생이 감춰져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페데리치의 말처럼 아버지와 남동생 손에 고무장갑을 끼우던 엄마의 외침도 그녀만의 투쟁이었다. 언제까지 ‘엄마’의 희생에 기대야 할까. 그런 사회라면 출산율에 대한 희망도 없다.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