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풀어주자 골목상권 빼앗은 대형은행

입력 2022-09-21 04:08
서울 종로구에 있는 시중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연합뉴스

혁신금융서비스(금융규제샌드박스) 제도가 대형 금융사 사업 확장 도구로 활용되면서 골목 상권 침해 등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도입 취지인 금융 혁신과 핀테크 육성은 이루지 못한 채 기득권 금융사의 수익 추구 도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다.

국민일보가 국민의힘 유의동·더불어민주당 윤영덕 의원실과 함께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된 224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중소기업·핀테크 몫은 59건(26.3%)에 불과했다. 나머지 165건은 시중은행 등 대형 금융사가 차지했다.

2019년 도입된 혁신금융서비스는 혁신성을 갖춘 금융 서비스에 대해 최대 4년간 한시적으로 관련 규제를 풀어주는 제도다. 혁신금융서비스 승인 1호는 KB국민은행의 알뜰폰 ‘리브엠’ 사업이다. KB는 “통신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존 은행권 문법과 다른 혁신적인 예·적금, 대출 상품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3년여가 지난 지금 60여곳이 넘는 중소 알뜰폰 업체는 ‘대형 메기’의 출현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 KB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원가(망 이용료)가 3만3000원인 데이터 11GB 요금제를 2만4800원에 팔고 있기 때문이다. KB는 지난 5월 가입자 수 30만명을 확보해 출범 2년 6개월 만에 알뜰폰 시장 점유율 5%를 차지했다. 출혈 경쟁에 뛰어들지 못하는 중소 알뜰폰 업체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KB는 리브엠과 연계해 스마트폰 구매 자금 대출을 선보였지만 이는 단순히 이동통신사 할부 이자율(5.9%)보다 낮은 금리(3.4~4.4%)를 제공하는 것으로 혁신 상품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KB는 혁신금융서비스 지정 후 금융-통신 데이터 연계에 필요한 시스템조차 구축하지 않았다.

같은 혁신금융서비스 승인을 받아 사업을 시작한 신한은행의 배달 애플리케이션 ‘땡겨요’도 마찬가지다.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등 스타트업이 개척한 시장에 후발 주자로 뛰어든 뒤 쿠폰을 뿌리며 시장 점유율 높이기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나마 혁신성을 띠면서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서비스는 대출 상품 조건 비교(핀다 등), 부동산 조각 투자(카사코리아 등) 등 중소 핀테크 업체뿐이다. 그러나 혁신금융서비스 절차와 승인 과정 모두 대형 금융사 편의로 되어 있어 중소 핀테크 업체가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 실정이다. 결국 현재까지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혁신금융서비스는 ‘혁신 없는’ 알뜰폰 판매사업(리브엠)인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에 대해 KB 측은 “리브엠을 통해 금융과 통신을 융합하기 위해 각종 금융 상품과 서비스를 계속 개발 중”이라며 “중소 알뜰폰 업체와도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꾸준히 대화하겠다”고 밝혔다.

유 의원은 20일 “현 혁신금융서비스 제도는 대형 시중은행의 수익 창출에만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시행 4년째를 맞은 이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진욱 임송수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