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찍으면” “너 포기 못해”… 구애 아닌 스토킹

입력 2022-09-21 04:05
20일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앞에서 열린 ‘희생자를 위한 추모 문화제’에서 참석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뉴시스

A씨는 지난해 12월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주지 않자 그의 집으로 니트 등 옷과 쌀 20㎏ 한 포대 등의 선물을 보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사랑한다’고 쓴 편지를 집 대문에 꽂아두기도 했다.

B씨는 아내와 이혼하면서 연락이 끊긴 딸의 집을 10여년 만에 찾아가 편지를 두고 갔다. 편지에는 ‘너를 본 지가 참 오래되었구나. 11년이 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구나. 연락해 주기 바란다’고 적었다. 딸의 답장이 없자 김치와 빵을 사다가 집 앞에 뒀다. 딸이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자칫 전 연인을 향한 구애, 딸을 향한 부성애로 포장되기 쉬운 A씨, B씨의 행위는 모두 ‘스토킹처벌법’이 적용돼 유죄 판결이 나온 사례다. 두 사람은 최근 1심에서 각각 벌금 300만원과 400만원을 선고받았다. 두 재판부 모두 이들이 반복적으로 선물·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피해자 의사에 반해 불안감·공포심을 유발하는 스토킹 범죄”라고 판단했다.

최근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화장실에서 스토킹 피해자인 여성 역무원이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스토킹 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의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스토킹이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만큼 스토킹 초기 단계부터 범죄 행위임을 인지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20일 시민들이 추모 메시지를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스토킹처벌법이 적용된 판례들을 살펴보면 물리적 위협이 없는 편지나 전화, 문자메시지, 선물 등도 피해자를 불안하거나 공포스럽게 만들었다면 처벌 대상이 됐다.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지난 4월 15차례 옛 연인의 집을 찾아가 선물을 두고 오거나 ‘책 걸어놨는데 봤어? 잘 읽어’ 따위의 문자를 보낸 C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반복해서 피해자에게 물건을 도달토록 하는 행위’도 스토킹 범죄에 해당한다고 봤다. 창원지법 통영지원은 공중전화로 직장 동료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끊는 행위에 대해서도 “피해자에게 불안감을 일으켰다”며 벌금형을 내렸다.

금전·고용 관계 등에서 발생하는 스토킹도 있다. D씨는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된 뒤 수십 차례 문자와 전화로 해고 사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서 “가게로 찾아가겠다”고 겁을 준 혐의로 지난 6월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스토킹은 직장 동료 등 인접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아 신고 등 대처가 어려운 만큼 주변에서 함께 문제가 되는 행동을 지적해줘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변현주 여성긴급전화1366 전국협의회장은 “피해자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들을 두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식의 적극적 구애 활동으로 포장하는 분위기가 피해자 대응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이어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줘야 인식이 바뀌고 피해자를 더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특히 스토킹 범죄는 초기 단계부터 엄격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자칫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스토킹 행위가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전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강소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교제나 합의 등 목적을 위해 상대를 괴롭히며 스토킹하는 경우는 목적 달성 때까지 점진적으로 여러 범죄 행위를 시도한다”며 “신당역 사건처럼 강요, 살인 등 강력범죄로 발전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양한주 박민지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