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번 협박해도 결국 솜방망이’ 법·제도에 구멍 숭숭

입력 2022-09-20 00:03
청년단체들이 19일 오후 서울지하철 신당역 10번 출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14일 벌어진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과 관련해 스토킹, 불법촬영, 성폭력 가해자 등에 대한 엄벌과 법적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한결 기자

“수사나 재판을 받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고소 취하해라. 안 그러면 가만 안 있을 것’이라는 한마디만 해도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상 보복 범죄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혐의로 피의자가 구속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스토킹 사건에선 피해자에 대한 보복 협박을 구속영장 심사 단계에서 증거인멸 시도로도 간주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이후 수사기관과 사법 당국의 미온적 대처와 스토킹 범죄 관련 법 제도의 허점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스토킹 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조항 삭제 외에도 추가로 근본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신당역 살인 사건 피의자 전주환(31)이 구속을 면한 배경을 두고 서초동의 성범죄 사건 전문 변호사들은 19일 법 적용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전씨가 3년간 수백 차례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했는데, 특가법상 ‘보복 범죄’ 혐의를 적용하지 않은 게 의문스럽다는 지적이다.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변호사는 “신고나 고소 이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한 번만 연락해도 기본적으로 특가법상 보복 범죄 적용을 주장할 수 있다”며 “(당시 전씨의 연락으로) 피해자에 대한 위해 우려는 매우 현저해진 상황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다른 성범죄 전문 변호사는 “보복 범죄를 성립시키려면 보복 의도를 입증해야 하는데 그 요건을 갖추는 게 까다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지난해 10월 전씨에 대해 성폭력 처벌법 위반 혐의(촬영물등이용협박 등)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됐다. 피해자는 지난 1월 스토킹 혐의로 전씨를 재차 고소했지만, 경찰은 구속영장을 재신청하지 않았다.

구속영장 심사 단계에서 보복 우려를 적극 고려하지 않는 관행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성범죄 사건 전문인 이은의 변호사는 “구속영장 발부 요건 중 증거인멸 우려를 평가할 때 피해자에 대한 보복 우려도 감안돼야 한다”며 “아예 입법을 통해 구속영장 발부 사유에 ‘보복 범죄 우려’를 포함하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토킹 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를 추진하는 법무부 대책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 변호사는 “법원이 양형을 판단할 때 지나치게 피해자와의 합의에 의존하는 관행도 함께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스토킹 혐의를 적용해도 합의 의사가 있다면 가해자가 감형을 받을 수 있어 피해자에 대한 합의 회유·협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킹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경찰의 긴급응급조치, 법원의 ‘잠정 조치’ 역시 그 기간과 처벌 수위로 볼 때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스토킹 범죄에 대한 ‘피해자 보호명령제도’와 ‘조건부 석방제도’ 도입을 촉구했다. 피해자 보호명령제도는 피해자가 수사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법원에 보호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과 신변경호 인력 배치 등을 법원에 직접 요청할 수 있다. 조건부 석방제도는 법원이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할 경우에도 가해자의 활동 반경 제한이나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의 조건을 붙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구정하 기자 g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