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에 18일 오전 최모(12)군이 자신보다 한참 작은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신당역은 최군이 주말마다 교회를 가는 길에 이용하는 지하철역이다. 최군은 “‘약한 사람을 상대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며 “저나 동생도 위험해질까봐 무섭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4일이 지났지만 시민들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곳에서 희생자를 추모했다. 추모 공간을 방문한 이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 작동하지 않는 법에 대한 무력감,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특히 피해자와 비슷한 연령대인 젊은 여성들은 무력감을 호소했다. 피해자가 두 차례 고소까지 했지만 무방비로 희생당한 데 충격이 크다. 이곳에서 만난 여성 김모(29)씨는 “강남역 사건 때는 화나고 공포스러운 감정이 컸다면 이번엔 무력감과 허탈한 마음이 더 크다”며 “이번 사건 이후로 휴대전화 메인 화면에 112 긴급신고 앱과 서울시 ‘안심이’ 앱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강남역 사건은 지난 2016년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 김성민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다.
강남역 사건 당시 젠더 갈등이 표출됐던 것과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30대 남성 김모씨는 “이런 사건이 반복되다 보니 여성들이 범죄에 더 많이 노출돼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여성들의 안전에 대한 외침이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강남역 사건 때와 비교해 보면 사회 전반적인 공분이 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강남역 사건 때는 추모 행사를 진행하면 그때마다 반대 단체의 백래시(반발)가 있었는데 지금은 가족 단위나 할아버지 할머니 연인들도 함께 추모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여성 대상 스토킹 범죄가 이어지자 두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크다. 신당역 10번 출구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에 붙은 포스트잇을 찬찬히 읽던 박모(35)씨는 “강남역 사건 이후 화장실이 안전하지 않은 공간으로 인식돼 밖에서는 참거나 어쩔 수 없을 때만 가곤 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지하철역조차 공포스러운 장소가 됐다”고 토로했다. 박소영(25)씨는 “어젯밤에도 지하철에서 화장실 쓸 일 있었는데 이 일이 생각나면서 겁이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직장인 김모(26)씨는 “피해자가 신변 보호를 요청해도 가해자가 마음만 먹으면 마주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해 이번 일이 터졌다”고 말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미 고소가 접수된 사건이어서 충분히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었는데도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는 점에서 모두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성윤수 송경모 양한주 기자 tigri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