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좋아하는 마음

입력 2022-09-09 04:02

책을 다루며 일하는 친구가 ‘요즘은 마음이 대세’라고 했다. 몰라서 몰랐지,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세상이 온통 마음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친 퇴근길에 흔한 위로가 아닌 일에 대한 애정을 북돋아 주는 북 칼럼니스트의 책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영화에 대해 공들여 묘사한 글을 모아놓은 영화 기자의 책, 정확하고 뾰족한 문장들로 세상과의 유효한 소통을 시도하는 대중문화 전문 필자의 책까지, 온통 마음에 펜과 귀를 기울인 사람들뿐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창작자와 사랑받아야만 생명력을 얻는 노래들 사이에서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좋아하는 마음은 나를 지금의 여기로 기꺼이 이끈 거역할 수 없는 힘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고 말했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저쪽’이 아닌 이쪽’의 사람이 돼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만난 무언가를 좋아해서 샘솟는 기운들은,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에너지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좋아하는 대상을 만나기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그 힘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순간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그로 인해 이어지는 연쇄 작용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기도, 힘들이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팬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팬은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대상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그것이 아름답고 귀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낌없는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점점 덩치를 불려 나간 이들에게 언젠가부터는 ‘팬덤’이라는 이름표도 붙었다. 팬이 가진 원래의 뜻에 나라를 뜻하는 단어 ‘dom’을 더했으니, 새로운 영토이자 세력이라고 한다면 그런 셈이었다.

어엿한 이름표를 붙이고 나자 그들이 가진 좋아하는 마음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선한 관심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우스꽝스럽다는 손가락질이 대다수였지만 이내 다른 관심의 비율이 높아졌다. 어떻게든 ‘호갱’이 되고 싶지 않은 깐깐한 소비자들과 날이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대중의 입맛 사이에서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팬덤의 좋아하는 마음은, 창작자와 제작자들에게는 그대로 사막의 오아시스 그 자체였다. 문화계에서 산업계까지 팬덤을 이용한 마케팅이 수도 없이 쏟아졌고, 이 마음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일부는 팬덤에 소비자를 뜻하는 컨슈머(Consumer)를 더해서 팬슈머(Fansumer)라는 새로운 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좋아하는 마음에서 팬슈머까지. 한 걸음이면 닿을 것 같기도,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느껴지기도 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좋아한다. 오로지 선한 의지가 만들어 낸,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귀한 울림이 그 안에 있다. 목적 없이 흐르는 것을 전부 잉여로 치부하는 냉혹한 세상 속에서 내가 누군지 알 수도 없고 알 리도 없는 대상에게 지치지 않고 보내는 동그란 마음보다 멋진 걸 아직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모든 것이 핑크빛인 건 아니다. 나만 특별해지고 싶다는 사념이나 그를 이용해 한몫 챙겨 보려는 누군가의 어두운 욕망과 만날 때, 좋아하는 마음은 첫 봉오리를 피우던 때의 생기와 빛을 금세 잃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빛과 그림자 모두를 너무나 잘 알기에 유명 포크 가수가 사람 좋은 미소로 노래하던 것처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걸’이라고 해맑게 말하진 못하겠다. 다만 좋아하는 마음이 본연의 색을 잊지 않을 때 그리고 그런 마음들이 서로를 순하게 알아볼 때 세상이 그만큼 따뜻하고 향기로워진다는 건 여전히 믿는다. 그 마음을 안고, 오늘도 좋아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좋아하기로 한다.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