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동남쪽 서식스 지방에 ‘넵’이라는 이름의 3500에이커(약 450만평) 규모 대농장이 있다. 수백 년간 목초지였던 이곳은 1940년대 농경지로 개간돼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유제품을 만들어 팔던 곳이었다. 조부모로부터 이 농장을 물려받은 찰리 버렐과 그의 부인 이저벨라 트리는 거듭되는 적자에 시달리다 2000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경작을 포기하고 땅을 농경지 이전의 야생 상태로 되돌리는 ‘야생화’ 혹은 ‘재야생화’에 돌입한다.
“찰스 경은 농사가 잘된 사유지를 엉겅퀴, 소리쟁이, 금방망이로 뒤덮인 황무지로 바꾸었다.” 주변에서는 비난이 쇄도했다. “그는 멀쩡한 땅을 황무지로 바꾸고 있다. 누군가는 그를 말려야 한다.” 환경보존 운동가들도, 정부 농업정책 담당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연의 생태계가 다시 기능하는 땅이 되었고, 야생생물의 수가 급증해 수많은 멸종위기 동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야생생물 보존 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으며, 유럽연합이 주는 ‘안데르스 발 환경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남편과 함께 넵 야생화 프로젝트를 주도한 이저벨라 트리가 쓴 ‘야생 쪽으로’는 이 유례 없는 실험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다. 인간이 경작을 포기하고 땅을 자연에 맡겨두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간이 물러난 땅에서 자연이 무슨 일을 하는지 보여준다.
넵 프로젝트는 땅을 경작지로만 바라봐온 생각을 뒤집어 버린다. 땅을 그대로 놀리는 것이 과연 비윤리적인 것인지 묻는다. 나아가 환경을 보존한다고 여겨온 농업이 실제로는 자연을 망가뜨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땅을 살리고 생태계를 회복함으로써 종의 보존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종의 보존에만 매달리는 환경보호 운동의 맹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농경지 야생화를 한계에 처한 농업과 시골의 대안으로 제시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농사 지을 사람들이 사라지고 농업의 경제성이 악화하면서 농사를 포기하거나 농지를 버려두는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농경지를 목초지로 되돌리면 엄청난 규모로 이산화탄소 포집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기후위기 대책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얘기가 될 수 있다.
김남중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