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잠든 것처럼/ 보일 뿐,/ 씨앗들/ 은/ 들썩인다./ 불은 씨앗들에게 입 맞추고, 물은/ 자신의 띠로 씨앗들을 건드린다./ (중략)/ 난 씨앗, 나뭇잎,/ 익어 가는 떡갈나무다.”
남미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대지의 풍요를 기리는 노래’ 속 한 구절이다. 인간은 떡갈나무와 같다. 작은 씨앗으로 태어나서 우람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저절로 그리되는 건 아니다. 씨앗이 떡잎이 되고 떡갈나무가 되려면, 불의 입맞춤에 단련되고 물의 포옹에 허우적대야 한다.
불은 따스하나 아프고, 물은 포근하나 숨 막힌다. 대지는 우리를 무한정 사랑하나 그 사랑의 형태는 때로 시련의 형태를 띤다. 우리 존재가 잠들지 못하도록 들썩이게 하기 위해서다. ‘가만한 존재’는 죽음의 존재다. 예수에 따르면 타고난 소질을 땅에 가만히 묻어둔 자는 사악하고 게으르다. 우리 안에 잠든 씨앗을 싹틔우고 튼튼히 돌보아 떡갈나무로 성숙시키는 일, 어쩌면 이것이 삶의 과제일 테다.
다가올 한가위는 대지의 풍요를 기리는 시간이면서 또한 자신의 성숙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성숙’에서 숙(熟)은 ‘익다’란 뜻이다. 숙(孰, 삶다)과 화( , 불)가 합친 말이다. 물에 삶고 불에 익히면 먹을 수 없는 건 먹을 수 있도록, 맛없는 음식은 맛있는 음식으로 변한다. 성숙이란 불과 물을 통해 존재의 질을 바꾸는 일이다. 곡식과 과일은 대지의 품속에서 자신들을 익힌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타고난 대로 가만히 사는 건 어리석다. 인간은 본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변할 수 있다. 두렵고 힘들더라도 대지의 축복을 받아들여 들썩이는 존재가 돼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사과는 불볕을 참아 붉어지고, 배는 폭풍우를 견뎌 달아지며, 감은 무서리를 이겨내 말랑해진다. 바람의 숨결을 좇아 춤추는 사람만이 천사가 된다. 가만히 있으면 인간은 조악할 뿐이다.
공자도 ‘가만한 존재’여선 안 된다고 했다. “바탕(質)이 문양(文)을 이기면 조야하고, 문양이 바탕을 이기면 겉치레일 뿐이다. 바탕과 문양이 어울려서 빛을 낸 후에야 군자답다.” 타고난 대로 야(野)하게, 즉 거칠고 조야하게 살지 말고, 예의를 갖추고 덕성을 길러서 더 나은 존재(군자)로 살려고 애쓰라는 말이다. 인간은 야하면 안 되고 반짝이는 존재로 성숙해야 한다.
인간의 성숙에는 선명한 방향이 존재한다. 떡갈나무가 태양을 향해 팔을 뻗듯 성숙을 바라는 인간의 삶은 특정한 지향성을 띤다.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은 형편없는 존재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만 자신과 영원히 함께할 존재가 되리라고 예수는 말한다.
공자도 비슷한 말을 한다. “내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이것이 공자가 추구하는 인(仁)함의 핵심이다. 타자를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실천이다. 타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해도, 나의 욕구를 먼저 양보하고 포기하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다. 이기적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이 존재의 격을 높이는 일이고 성숙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태어날 때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 아는 존재로 태어난다. ‘나’를 뜻하는 한자 기(己)는 본래 뱀이 돌돌 말린 형태를 본뜬 것이다. 한마디로 기(己)란 존재는 금화를 땅에 묻고 가만히 웅크린 상태, 즉 극단적 자기 보존 본능에 사로잡힌 존재를 상징한다. 성인의 가르침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 조악한 존재들을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설득함으로써 타인을 향해서 열린 존재로 만드는 데 그 핵심이 있었다. 이른바 수신(修身)이다.
날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구슬을 자르고 다듬고 쪼고 갈아서 반짝이게 하지 않는 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성숙한 삶을 살 것인가를 나날이 묻고 답하면서 자신을 돌봐야 한다. 한가위는 자신의 성숙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보는 시간이다.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하루 자신을 닦아야 할 것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