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호 태풍 ‘힌남노’의 한반도 상륙이 임박하자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부디 안전한 곳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했지만 상당수 택배·배송기사들은 그럴 수 없는 처지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배달 물량이 쏟아져 강풍과 폭우 속에서도 거리로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한 택배회사는 힌남노에 대한 우려가 커지던 지난 4일 ‘반드시 정상 배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택배기사들에게 보냈다. 진경호 전국택배노조 위원장은 5일 “배달노동자들이 택배회사 경쟁력을 위해 아무 대책 없이 위험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강풍은 택배기사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최종호 택배노조 부산지부 CJ연제수영지회장은 “바람이 세면 탑차 여닫이문을 고정하기가 쉽지 않다”며 “문에 부딪히거나 차량이 부서져 다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폭우로 인해 유실된 도로에 갇히고, 맨홀 뚜껑이나 횡단보도 페인트칠한 부분에 미끄러져 사고를 당하는 사례도 속출한다.
물품 파손 우려도 크다. 천재지변의 경우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지만 면책 사유를 인정받기 매우 어렵다고 한다. 명절을 앞두고 배송이 많은 식품은 배달이 지체되면 상할 우려도 크다. 진 위원장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일할 수 없다”며 “고객 민원은 오로지 노동자가 감당해야 해 더 긴장하며 일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달 수도권에 기록적 폭우가 내렸던 때도 택배기사들은 할당 물량을 일정대로 소화해야 했다. 아직 안전·복지 조항을 담은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않아 택배기사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는 ‘작업을 거부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날 CJ대한통운을 제외한 4개 택배사는 일부 지역 집하를 중단키로 했다. 하지만 택배기사들은 “태풍이 전국적으로 타격을 줄 것으로 예보됐는데 일부 지역만 작업을 중단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국택배노조는 성명에서 “5일 집하 업무, 6일 하차 업무를 전면 중단해 달라”라고 촉구했다.
배달 라이더들도 쉽게 일을 놓을 수 없다. 수도권에서 배달대행업체를 운영하는 이모씨는 태풍 소식에 휴업도 고민했지만 결국 영업을 하기로 했다. ‘태풍이 지나가는 이틀간 휴업할 수도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주변의 배달 연계 자영업자들에게 보냈더니 “우리는 어떻게 하나. 앞으로 다른 업체를 이용하겠다”는 항의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경우 수수료를 2~3배씩 올려주며 배달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위험을 야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배달기사는 “비가 쏟아지고 태풍이 몰아칠 때 일하면 평소의 3배는 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며 “아예 배달을 쉴 수 있으면 마음이 편할 텐데 동료들이 출근한다고 하면 위험할 줄 알면서도 흔들리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플랫폼 차원에서 배달을 막기도 하지만 동네 배달은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며 “재난 상황에서 사고가 빈번하지만 아무 규칙이 없어 자율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박민지 성윤수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