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단 한 푼의 혈세

입력 2022-09-05 04:06

“피 같은 대한민국 국민 세금이 한 푼도 유출되지 않도록….” 지난달 3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론스타 투자자·국가 간 분쟁(ISDS) 사건 결과에 대해 설명하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브리핑을 듣다 순간 멈칫했다. 국민의 세금은 소중하기에 허투루 쓸 수 없으며, 그것도 해외 투기 자본에 줄 수 없다는 말이 이상한 건 없었다. 한 장관 특유의 단호한 말투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황했던 건 3000억원 배상 판정을 받은 정부가 “론스타가 청구한 금액 대비 4.6%만 인정됐다”며 판정 취소 신청에 나서겠다는 자신감과 결연함을 보이는 데서 온 위화감 때문이었다.

론스타가 외환은행 매각 과정의 부당 개입을 이유로 한국 정부를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하면서 청구했던 금액은 무려 46억7950만 달러로 우리 돈 6조원이 넘었다. 이 천문학적 숫자가 정부에 얼마나 큰 부담 요소였는지 생각하면, 2억1650만 달러(약 2800억원)를 배상하라는 결과에 ‘그래도 다행’이란 말이 먼저 나온 게 사실이다. 판정문 분석도 마치기 전 “소수 의견에 따르면 우리 정부 배상액은 0원”이라거나 “청구액수가 많았던 조세 쟁점에 관해서는 모두 우리 정부가 승소했다”와 같은 자신 있는 평가가 장관 입에서 나온 건 정부가 그만큼 고무됐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지만 론스타 청구액 중 95.4%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정부가 90% 이상 승소한 것처럼 포장할 순 없다. 정부는 취소 신청에 나서겠다는 입장이지만 실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10% 내외에 그치는 등 현실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대로 배상액이 확정되면 정부는 안 써도 됐을 돈 3000억원 이상(지연 이자와 소송 비용 등 포함)을 지급해야 한다. 반대로 이미 외환은행 인수와 매각을 통해 세전 4조원가량의 이득을 본 것으로 알려져 ‘먹튀’란 비난을 받았던 론스타는 우리 정부에게서 배상까지 받게 된다. 금액이 얼마든 우리 정부의 패소인 셈이다. 앞서 2019년 이란 다야니 가문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935억원을 청구한 ISDS 사건은 최종 배상액이 730억원으로 다소 줄었지만 우리 정부 첫 ISDS 패소 사건으로 기록됐다.

물론 우리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 규모가 639조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3000억원이 감당 못할 액수는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3000억원은 반지하·쪽방·비닐하우스·고시원·노숙인 시설 등에 거주하는 취약층이 정상적 거처로 옮길 수 있도록 이사비와 보증금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 편성된 예산 규모이기도 하다. 잘 쓰이면 그만큼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소중한 예산이다.

더욱이 론스타 사건은 금전적 피해만 남긴 게 아니다. 외환은행 인수 시점인 2003년으로부터 거의 20년간 우리 정치 사회에 남긴 생채기는 크다. 외환은행 매각이 대두된 김대중정부부터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정부를 거쳐 현 정부까지, 사실상 민주화 이후 거의 모든 정권이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만큼 수많은 정치적 법정 공방과 책임론이 공수만 바꿔가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혈세 단 한 푼’이라는 한 장관의 표현은 중재부 판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연한 태도와 오묘하게 상충됐다. 의도는 아니었으리라 믿지만, 결과적으로 ‘3000억원 배상액’의 의미를 ‘혈세 한 푼’ 혹은 ‘4.6% 배상’ 정도로 축소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말 국민을 걱정하는 정부라면 애초 정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지난한 분쟁을 겪고 결국 그로 인한 비용까지 치르게 되는 상황에 대한 자성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았겠나. 외환은행 사태 책임자를 찾아 처벌해야 한다는 반복된 주장은 뒤로 하더라도 말이다.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