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거문도 간첩단’ 사건 누명으로 최대 무기징역형이 내려졌던 일가족 5명이 재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유죄 판결 이후 45년 만이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재판장 정진아)는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고 김재민씨, 고 이포례씨와 이들의 자녀 3명의 재심에서 지난 1일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가안보와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에 희생당하신 분들께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이자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귀순한 북한 공작원인 김용규는 1976년 9월 북한에서 거문도로 남파됐다가 동료들을 사살하고 경찰에 자수했다. 수사기관은 그의 진술을 바탕으로 김재민씨 부부와 자녀들이 거문도 일대에서 대남공작원들의 간첩활동을 돕거나 입북을 모의하고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듬해 김씨와 이씨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그 자녀들도 징역형과 집행유예 등의 판결을 받았다. 일가족 5명의 형량은 항소심과 상고심을 거쳐 그해 그대로 확정됐다.
김씨 부부의 사망 이후 자녀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재판부는 이 사건 증거들에 대해 “남파 공작원 김용규의 혼란스럽고 일관되지 않은 진술에 맞춰 수사기관에서 반복되고 집요한 질문으로 재구성됐다”며 “국가폭력이 개입됐다는 강한 의심이 들어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압수물 역시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가족 소유물을 압수한 것으로 위법 수집 증거라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김씨 부부의 자녀들은 “경찰이 쇠몽둥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틀어 돌렸다” “옆방에서 아버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힘들었다” 등 고문 정황이 담긴 증언을 했다. 재판부 역시 “가족들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 상당한 의심이 든다”며 자백 진술도 효력이 없다고 봤다.
재판장은 선고를 마치며 “폭력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중 가장 극악한 것은 국가폭력”이라며 “막강한 인적·물적 조직을 가진 거대한 국가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