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아트페어인 영국 프리즈가 한국화랑협회와 손잡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 출범시킨 ‘프리즈 서울’이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지난 2일 VIP를 대상으로 개막했다. 5일까지 나흘간 열리는 이 세계적인 미술장터는 첫날부터 열기로 가득했다.
피카소 등 뮤지엄급 작품 선봬
행사가 열리는 코엑스 3층의 ‘공식 언어’는 영어였다. 참여한 갤러리 21개국 110여곳 중 한국 갤러리는 국제, 현대, 학고재, 리안, 원앤제이 등 겨우 12개였다. 입장객들도 외국인 반, 한국인 반이었다.
일본 도쿄의 근무지에서 왔다는 중국인 여성 컬렉터는 “가격이 적당하면 사겠다”면서 한 갤러리 부스에서 일본 작가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온 컬렉터 겸 아트어드바이저라고 자신을 소개한 30대 여성은 “코로나로 인해 지난 3년 간 못 만난 갤러리스트, 컬렉터들을 이곳 서울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있다”며 즐거워했다. 서울이 국제 도시 홍콩을 대신해 세계 각국 컬렉터들을 손짓하는 아시아 미술 유통 허브로 부상하는 순간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프리즈 서울이 각국 컬렉터와 미술관 관계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은 참여한 갤러리의 메가톤급 위력에서 나온다. 세계 최정상 갤러리인 가고시안과 하우즈앤워스가 프리즈를 발판삼아 처음으로 한국에 진출했다. 또 데이비드즈워너, 화이트큐브, 글래드스톤, 페로탕, 타데우스 로팍, 페이스, 리만머핀 등 정상급 갤러리들이 참여함으로써 A급 미술장터로서의 격을 부여했다.
가고시안 갤러리 관계자는 “새로운 아트페어인 만큼 우리에겐 새로운 기회다. 여기 서울에 와서 기쁘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사이먼 폭스 프리즈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한국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프리즈 본사가 있는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서울에서 네 번째로 아트페어가 개최된 것이지만, 참여 갤러리 규모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이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고 강조했다.
100년 전통의 뉴욕화랑 아쿠아벨라 갤러리는 파블로 피카소가 연인 마리 테레즈 발테르를 그린 1937년 작 ‘방울 달린 빨간 베레모 여인’을 들고 한국에 왔다. 4500만 달러, 즉 600억원이 넘는 이번 프리즈 최고가 작품으로 전해졌다. 전설적인 카스텔리는 ‘행복한 눈물’로 국내에 알려진 미국 팝아트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개인전을 꾸며 미술사 거장의 작품을 보여주는 ‘프리즈 마스터즈’에 참여했다. 15만 달러(2억원)∼500만 달러(68억원)의 작품들이다.
가고시안은 값이 200만 달러(27억원) 이상 나가는 데미안 허스트의 그 유명한 약 상자 작품을 들고 왔고, 또 미니멀리즘 작가인 리처드 세라의 회화, 도널드 저드의 조각도 선보였다. 하우즈앤워스는 거장 조지 콘도의 신작 ‘붉은 초상화의 구성’을 걸고 그 아래 여성주의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형물 ‘회색빛 분수’를 배치해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서양 현대미술사 교과서에나 볼 수 있는 거장들의 명작을 스위스 바젤이나 영국 런던의 아트페어에 가지 않고 서울 한복판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상륙이 가져온 큰 변화다.
수십 억대 작품들… 완판 갤러리도
첫날부터 수십억짜리 작품들이 속속 팔려나갔다. 하우즈앤워스는 조지 콘도의 그림 ‘붉은 초상화의 구성’이 38억원에 팔렸다고 밝혔다. 국내 한 사립미술관에 팔렸다.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 출신인 마크 브래드포드의 그림은 한 개인 컬렉터가 180만 달러(24억5000만원)에 사갔다. 1975년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 전’을 열어 요즘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단색화의 시발이 된 도쿄갤러리는 프리즈 마스터즈 섹션에 참여했다. 도쿄갤러리 관계자는 “우리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그래서 프리즈 서울에 왔다”며 “첫날 6∼7점이 팔렸다. 중국과 일본, 한국 컬렉터들이 사갔다”고 말했다. 부스는 이우환, 이강소, 윤형근, 키시오 슈가 등 각각 1970년대 한국과 일본의 동시대미술인 단색화와 모노하(物派) 작가들로 꾸몄다. 마침 당시 40대 나이에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전에 참여했던 원로 박서보 작가가 부스에 들러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완판 갤러리도 등장했다. 제네바 런던 등에 갤러리를 둔 LGDR은 매일 작가를 바꿔 개인전을 꾸민다. 첫날은 40대 미국 회화 작가인 조엘 메슬러의 개인전으로 부스를 채웠는데, 모두 팔렸다고 한다. 갤러리 관계자는 “서울의 미술시장은 젊은 세대가 컬렉터 층으로 새롭게 진입하며 에너지가 넘친다. 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다른 걸 원하고, 컬렉션을 자랑하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외국에서 공부해 국제적인 감각이 있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프리즈 서울에서 만난 40대 한국인 부부 컬렉터는 “프리즈가 세계적인 갤러리들을 데리고 온 덕분에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만 보던 외국의 핫한 작가들의 작품을 실견할 수 있어서 신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내는 “투팜스갤러리에서 미국 개념미술가 멜 보크너의 소품 3000만원 짜리와 4000만원 짜리 두 점을 구입했다”고 귀띔하며 “한국 컬렉터들의 관심이 프리즈 서울로 쏠리면서 키아프(한국국제아트페어)가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프리즈는 북적… 키아프는 한산
이날 코엑스 1층에서는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가 동시에 개막했다. 같은 코엑스에서 열렸지만 3층의 프리즈 서울의 열기에 비하면 1층 키아프는 아주 한산했다. 특히 키아프는 지난해 과열을 우려할 정도로 손님이 몰렸던지라 올해 첫날 풍경은 격세지감이 들 정도였다. 키아프는 지난해 매출 650억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국제아트페어인 만큼 17개 국가의 갤러리 164곳이 참여했다. 하지만 ‘국제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한국의 갤러리 중심인 행사가 됐다. 특히 키아프에 참여했던 리만 머핀, 페이스 등 국내 진출 외국 갤러리들이 프리즈 서울에 주력하면서 키아프의 빛이 바랜 측면이 있다.
그나마 국제갤러리, 갤러리현대, 박여숙화랑 등 메이저갤러리에는 손님이 좀 있었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정상화, 이건용 작가 등 원로들의 작품 판매가 좋았다. 오히려 프리즈 서울은 마스터즈 섹션에 참가해 판매보다는 한국 미술을 알리는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프리즈 서울이 키아프 손님까지 뺏어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우리 고객들이 첫날 프리즈 서울을 보고 지쳐서 그런지 다음날 오겠다고 말하더라”며 “부스비도 지난해 3000만원대에서 올해 5000만원대로 껑충 올랐는데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또 다른 갤러리 관계자는 “앞으로 프리즈 서울이 열리는 5년 동안 해외 컬렉터들이 한국 작가로 관심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