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스킵하는 시대

입력 2022-09-05 04:02

직장인 김지연(38)씨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기가 너무나 답답하다. 보고 싶은 장면만 보고 나머지는 빠르게 스킵한다(건너뛴다). 맥락은 궁금하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듣고 싶지는 않다. 유튜브 등에 올라온 편집본, 소위 ‘짤’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콘텐츠를 둘러보기에 정말 편리하다.

수년간 이런 방식으로 콘텐츠를 즐기다 보니 영화처럼 길이가 긴 영상물에 집중하는 일이 김씨에겐 쉽지 않다. 이제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생각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지루해도 스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용을 곱씹을 만한 콘텐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콘텐츠는 솔직히 별로 없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는 영화를 볼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재미없는 장면은 스킵하고, 궁금한 장면만 보면 된다. 중요한 장면을 놓치면 뒤로 돌리면 되고, 지루하면 앞으로 넘길 수 있다.

모두들 시간은 없고, 볼 건 많다. 재밌는 볼거리도 많지만 골치 아픈 일도 쌓여 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고, 내일까지 마감인 기획안도 써야 한다. 콘텐츠를 보는 행위 안에서도 멀티태스킹이 이뤄진다. 영상을 틀어놓고 웹툰을 보기도 한다. 오디오드라마, 오디오북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 콘텐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의 영상 콘텐츠는 예전보다 선택받기 힘들다. 스킵하면서 보기가 쉽지 않고, 정신적 피로도가 큰 탓이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 느리고 여백이 많은 연출 스타일은 흥행에 성공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더 이상의 고구마는 사절’인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모범가족’에 출연한 배우 박희순을 최근 인터뷰했다. ‘모범가족’은 호흡이 느리다. 유튜브엔 ‘30분 만에 몰아보기’ 같은 콘텐츠가 등장했다. 전개가 답답하다는 일부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먼저 작품에 대한 관객의 호불호는 어느 작품에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OTT에선 스킵하기도 하고 몇 배속으로 돌리기도 하며 빠르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호흡이 느린 작품은 느림의 미학을 만끽할 때만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2배속으로 보면 당연히 재미가 없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몇 달간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일부만 보고 끄거나 빨리 보기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거 같다.”

지난 6월 공개된 티빙 오리지널 예능 ‘전체관람가+:숏버스터’는 ‘시대에 맞는 콘텐츠’라는 창작자의 고민을 보여줬다. 10명의 영화감독이 러닝타임 20분 안팎의 단편 8편을 제작했다. 프로그램 한 회차는 30분가량이다. 단편영화 한 편은 영화, 제작영상 및 토크 2개의 클립으로 구성됐다. 영화 클립만 볼 수도 있고, 제작영상을 보며 감독과 배우들이 이야기 나누는 클립만 볼 수도 있다. 영화라는 소재로 숏폼 콘텐츠의 예능을 만든 거다.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과 방식이 존재한다. 방식에 옳고 그름이 있다기보단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영화가 좋아서 두세 번씩 극장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장면만 보고 싶어서 극장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차이를 생각하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하다. 인물들의 말소리와 숨소리, 표정, 음악이 시작되고 끝나는 타이밍, 카메라의 앵글과 속도까지 모든 요소에 창작자들은 의미를 담았을 텐데 그게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운 시대다.

어느 순간부터 문화를 ‘향유’한다는 표현이 낯설어졌다. 사람들은 감상한다기보다 소비한다. 내용을 대충 이해는 하지만 몰입하지는 않는다. 긴 호흡은 버겁다. 2020년대의 문화일 것이다. 이것 역시, 일상이 너무 고달픈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상일까.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