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조성진 피아니스트 콘서트에 다녀왔다. 끝나가는 여름의 간지러운 바람과 유난히 선명했던 초승달 아래에서 수많은 관객과 함께 숨죽여 집중했던 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앙코르곡으로 연주됐던 드뷔시의 ‘달빛’ 도입부에서는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날의 밤공기와 비현실적일 만큼 잘 어울리기도 했거니와 조성진의 ‘달빛’ 연주 영상이 워낙 유명한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공연에 자주 갈 수는 없지만 그의 연주는 매일 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영상은 유니버설뮤직 클래식 채널에서 제작된 쇼팽 발라드 시리즈다. 그중 발라드 4번 영상의 초반에 그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막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 첫 건반을 오른손으로 거칠게 두드리며 “We don’t start up this piece(우리는 이 곡을 시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한 뒤 왼손을 허공에서 건반으로 서서히 당겨오며 “It’s already started(그것은 이미 시작돼 있어요)”라고 덧붙인다. 손으로 허공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음악을 데려와 피아노 위에 내려놓듯이 곡의 도입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뒤이어 놀랍도록 아름다운 연주가 잠시 이어진다.
댓글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런 설명을 이해하고,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시작돼 있는 음악의 존재에 공감하며, 섬세한 곡 해석에 감탄한다. 이 이야기는 곡을 더욱 선명히 들리게 하는 동시에 어째서 그의 쇼팽 발라드 4번이 그토록 아름다운지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돼준다. 귀로 듣는 소리는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현을 내리치고 현의 진동이 향판을 울리는 첫 음부터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전부터 이미 시작돼 있는 곡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피아니스트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리는 연주를 통해, 즉 들리는 연주 속에 들리지 않는 음악을 포함함으로써 곡을 표현한다. 인간과 예술이 공유하는 아름다운 아이러니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