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 옷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컬러, 형태, 소재 등 다양한 요소들을 살피며 세계의 패션 브랜드 사이를 돌아다니는 데는 국경과 언어의 제약이 없다. 아까 본 그 상품페이지와 위시리스트와 장바구니 사이를 몇 바퀴나 돌며 헤매다가 출구를 잃고 만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제력 또는 신용카드가 필요하다. 미니멀 라이프를 결심하며 입을 만한 옷들을 아름다운가게에 보냈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옷장에 빈 공간이 없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아름다운 카키그린 컬러의 린넨 재킷을 주문했다. 린넨 재킷을 입기엔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지만 큰 폭의 할인을 하고 있고, 마지막 상품만이 남아 있었다. 계절은 내년에도 돌아오니 내가 운이 좋았다. 조금 찝찝한 정신 승리로 쇼핑을 마무리하고 페이스북을 열었더니 ‘과거의 오늘’이라며 4년 전에 스크랩해뒀던 기사가 나타났다. 무인양품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의 인터뷰였다. 로고도 드러내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무인양품의 철학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인터뷰는 다시 읽어봐도 무척 공감됐다. 충분하다고 느끼고,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충분하다고 말해본 적이 언제였을까. 하나를 가지면 둘을 계획하고, 좋은 걸 경험하면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것이 당연한 룰이다. 그러다 보니 내 삶에서 많을수록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일상 곳곳에서 부담스럽게 넘치는 것들에 대해서조차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많을수록 좋은 것들은 누구도 쉽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요즘 읽는 책에 미국 나파밸리의 테이블 와인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와인으로 유명한 나파밸리에 사는 부자를 만나기 전에 그가 고급 와인을 실컷 즐기며 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식당에서 테이블 와인을 한 잔 마시며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맥주 한 캔이나 한 잔의 와인으로 충분할 때도 우리는 종종 샴페인을 터트리고 음식을 넘치게 주문한다. 편안한 차림으로 소박한 동네 식당에 가는 대신 비싼 식당을 찾고 그 식당에 가기 위해 옷을 차려입느라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적정기술’ 제품들을 전시한 적이 있었다. 별의별 기능을 탑재한 첨단 제품들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지만 한편에서는 꼭 필요한 기능만을 담아 최대한 저렴하고 간단하게 제품을 만드는 일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인프라가 부족한 저개발국에 판매 또는 무상 지원하기 위해서다. 시력이 나빠도 시력 측정이나 안과 서비스를 이용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액체를 주입해 도수 조절을 할 수 있는 안경이 있다. 아이들이 낮에 공을 차고 놀면 저녁에 라이트 기능을 하는 축구공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필요하다. 전화만 되는 휴대전화나 인터넷 검색만 되는 노트북으로도 누군가는 삶의 질이 높아지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
얼마 전 코로나에 걸려 1주일을 격리된 채 지냈다. 인터넷도 하고 밀린 드라마나 영화도 볼 수 있었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은 답답하고 외로웠다. 동네 카페와 식당에 가고,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친구와 만나 대화를 나누던 평범한 날들이 며칠 만에 아득히 그리웠다. 집에만 있기가 지루해 옷장을 열고 정리하다가 상의와 하의를 이리저리 매치해 입어보니 옷이 두 배로 늘어난 듯했다. 너무 많게 느껴졌다. 언제 다시 채워질지 장담할 수 없지만 인터넷 쇼핑사이트의 위시리스트를 결연히 삭제했다. 요리도 안 하면서 접시와 컵은 왜 이렇게 많은지, 맨발을 좋아하면서 양말도 너무 많다.
나는 충분하다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을 뿐 사실 지금도 충분한 것 같다. 충분함의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주문처럼 내 일상에 들여놓고 싶다. 벌써부터 한결 자유롭고 여유로운 기분이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