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韓流)와 관련된 국제학술행사가 최근 국내에서 연달아 열렸다. 제21회 국제대중음악학회 학술대회가 지난 7월 5~9일 대구에서, ‘제3회 BTS국제학술대회’가 같은 달 14~16일 서울에서 열렸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지난 4일 서울에서 개최한 ‘2022 KF 글로벌 한국학 포럼’에는 26개국에서 100여명의 한국학 전문가가 참가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쟁쟁한 행사들이 K컬처와 한국학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준다.
“한류를 단순히 유행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교육과 연결해 한국학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글로벌 파워로 등극하는 과정에는 해외에서 그들에 대해 가르친 학자들이 있어 중국학과 일본학을 연구하는 후속 세대가 양성됐고 중·일의 소프트 파워가 커졌다. 한국도 이제 그럴 시점이 왔다.”
올해 50주년을 맞은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의 첫 여성 원장인 우미성 영어영문학과 교수의 말이다. 공연예술학을 전공하고 동아시아 문화 연구와 한국학 진흥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해온 그에게 한류 현상과 글로벌 한국학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들었다.
-먼저 한류라는 용어의 숨은 뜻부터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어떤 의미인가.
“한류는 1990년대 후반 H.O.T의 중국 진출을 계기로 중국이 붙인 이름이다. 영어로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로 번역됐는데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파도처럼 일시적이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깎아내리는 듯한 부정적인 느낌이 깔려 있는데 우리 미디어들이 역수입해 썼다.”
-한류는 ‘hallyu’와 ‘Korean wave’로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나란히 실렸다. 최근 K컬처나 K콘텐츠라고 하지만 이 단어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촉발지가 한국이니까 K를 붙여 브랜딩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K 하나가 모든 걸 설명하는 신호등 같은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한류를 계속 쓰더라도 이 단어가 시작된 배경을 알면 좋겠다는 의미다. 그 부정적인 뉘앙스를 인지하고 다른 용어로 서서히 바꿔나가자는 고민과 문제의식이 있었으면 한다.”
-한류의 지속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처음 한류를 말했던 이들 중 일부는 2~3년, 길게 잡아야 10년 정도 이어지다 끝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이 흐름이 20년째 계속되고 있다. 한류가 단명하리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하리라고 본다. 한류는 대중문화를 넘어 문학과 미술로, 공연계로 확장된다. 줄리아 조 같은 한국계 작가의 작품이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고, 뮤지컬 ‘케이팝’이 내년 봄 재공연된다. K팝 시장에 발을 들인 젊은이의 성공담으로 미국인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다. MZ세대 한국계 작가 셀린 송이 쓴 ‘엔들링스’도 2020년에 이어 다시 무대에 오른다. 만재도 해녀 할머니 세 명의 이야기인데 무대미술적으로도 획기적이다. 커다란 수족관을 무대 위에 만들어 해녀들이 거북이나 물고기와 유영하는 장면을 실제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브컬처나 마이너리티 문화로 여겨지던 한류가 문화적 매력을 통해 한국에 호감을 갖게 만드는 소프트 파워가 됐다는 것에 이견이 없어진 건가.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2011년 풀브라이트 연구교수로 하버드대가 있는 보스턴에 가면서 미국 대학의 동아시아 학자들과 교류하게 됐다. 그때도 한국 영화에 관심을 갖는 분은 있었지만 그 지역에 한국을 연구하는 분은 없었다. 2016년 코넬대 아시아학과 한국학 방문교수로 갔을 때는 달랐다. 학생들이 BTS의 ‘봄날’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간판에 어떤 은유적인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고, K팝 나이트 행사에서 자이언티의 ‘꺼내 먹어요’를 부른 학생이 학생들 현장 투표로 1등을 했다.”
-몇몇 K팝 아이돌의 음악만 즐기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말씀이다.
“학생들의 취향에 깜짝 놀랐다. 2020년 에모리대 방문교수 때는 학생들이 한국 역사를 배우고 싶어 했다. 수업 정원이 초과됐는데 학생들이 ‘헬조선’이라는 단어도 알고 있고, 한국어로 어느 한국 컵라면이 자기 취향이라고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완전히 한국 문화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우 원장은 ‘공효진은 마이너리티 소수자적 감성을 보여주는 배우’라며 팬을 자처하는 코넬대 도서관 사서, 업무협약을 논의하는 줌 회의에서 대뜸 비비고 만두가 맛있다며 한국 음식 얘기를 꺼낸 예일대 교수, BTS와 블랙핑크를 좋아한다며 한국인은 아름답다고 말을 걸어온 프랑스 소녀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독일 베를린자유대 이은정 교수는 한국학이 개설된 유럽의 모든 대학이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은 많은데 교수가 부족하다. 제가 동서문제연구원장이 되고 나서 한국국제교류재단을 통해 11개국 19개 대학에 수업을 보냈다. 연세대 교수들이 온라인으로 수업을 제공하면 학점은 현지 대학에서 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대학마다 요구가 다르고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조지아공대는 한국어로 한국의 20세기 정치외교사와 문화사를 가르치는 수업을 주문했다. 일본 도쿄대 경제학과는 딱 집어 한국이 어떻게 초고속 성장을 이뤘는지에 대한 강의를 요청했다.”
-한류의 약진이 한국학 발전의 동력으로 잘 이어지고 있나.
“한류 때문에 한국학이 도약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자 환상이다. 넘쳐나는 학생들은 K컬처에 대한 관심으로 교양과목을 들으러 오는 경우고, 전공으로 진지하게 연구하는 대학원생은 줄어드는 추세다. 예컨대 한국 드라마를 연구해 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은 적다. 학부에서 재미가 연구자로서 커리어로 연결되고 한국학이 전도유망하다는 미래가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대학원생이 줄어든다.”
-전공하는 대학원생은 아니라도 많은 학부생이 한국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간다는 점은 한국학의 기회가 아닌가.
“미국 대학의 교수들은 한결같이 지금 해외에서 한국학은 위기라고 말한다. 일본학 중국학과 경쟁구도가 형성돼 견제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일본은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 회장이 일본학을 부흥시키자는 뜻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 2500만 달러(300억원)를 기부했다. 컬럼비아대는 유니클로 회장의 후원금으로 한국학 전공 대학원생을 뽑던 정원을 돌려 일본학 전공자를 더 뽑았다. 그럼 학생들은 한류는 취미로 남기고 일본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된다. 한류는 한국학의 모멘텀이지만 한국학 자체로는 전환기인 동시에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교육과 콘텐츠로 한국학을 연결해 외국 대학에 친한파 지한파 학자들과 학문 후속 세대가 많이 등장하게 해야 한다. 해외 연구자들과 소통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10년, 20년 후에는 한국학이라는 말이 필요 없이 해외에서 한국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들이 문학 미디어 예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포진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목표일 것이다. 한류를 이끄는 K드라마와 K무비, K팝 크리에이터들은 정말 잘하고 있다. 한류를 교육으로 연계하는 학자들이 제 몫을 할 때다.”
-한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반(反)한류의 움직임이 늘어난다고 들었다. K컬처를 한국 정부의 주도와 투자로 성공한 일종의 관제 수출상품처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대표적이라고 하는데.
“한류 연구 초창기 논문 몇 편에 늘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할리우드 영화 ‘쥬라기공원’ 한 편이 거둬들인 수익이 한국이 자동차 몇만 대를 수출한 숫자를 상회한다며 문화상품을 육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인용된다. 김대중정부에서 문화콘텐츠가 정부 차원의 많은 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한류는 한국 정부가 주도한 전략의 승리라는 뉘앙스로 끌고 나가는 논문도 많다. 한국 정부가 뒤늦게 소프트 파워의 가치에 눈을 뜨긴 했으나 그것이 한류를 견인해온 힘은 아니었다. 해외 학자들이 아직도 오해하는 부분이다.”
-한류와 한국학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리라고 보나.
“한국이 개인주의적·문화적 인권 이슈를 깨닫게 된 건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의 일로 얼마 되지 않았다. 톱다운(하향식)에서 개인으로 관심사가 좁아지면서 점점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문화콘텐츠도 영화 ‘국제시장’이나 ‘박하사탕’처럼 나라에 휘둘린 개인들의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개개인의 아픔과 삶을 얘기하는, 그래서 국가의 영향력이 엷어지고 최소화된 콘텐츠들이 나올 것이다. 한류의 미래에 대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외국에서 더 많이 한류를 배우려 할 것이고 외국 학생도 한국 대학에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연세대 국제대학원에 외국 학생이 몇백 명씩 오고 서머스쿨엔 1000~2000명씩 온다. 대단한 변화다. 재밌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