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도 보내고, 부장도 보내고, 사장도 보내고, 회장도 보내고. 국제화하지 않고는 1급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철저히 국제화하면서 국제화의 이기주의는 부리면 안 된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법을 따르고 풍습도 따르고 문화도 흡수하고 우리의 문화도 소개하면서 다 같이 잘사는 것이 국제화다.”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한 대목이다. 지역전문가에 대한 의견이 분명하다. 지역전문가의 의미와 실현 방법을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피력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이후 삼성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세계 초일류 기업의 시대를 만들어낸다. 사실 이 메시지는 정부가 깊이 관심을 두고 달려들었어야 했던 과제다.
지역전문가 양성은 국가적 과제임이 분명하다. 선진 강대국 혹은 제국의 조건으로 지역전문가의 인력풀을 언급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 지역에 관한 탄탄한 정보와 정확한 진단이 지역전문가에 의해 초벌로 만들어진다. 동시에 이들은 경제·외교·안보를 아우르는 국익과 국격을 위한 대변인 역할을 한다. 한 국가의 소프트파워는 상당 부분 지역전문가의 양과 질의 총합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 강국치고 이 부분이 취약한 나라는 없다. 패권은 이런 과정을 통해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그 대표적 모델이 미국이다.
미국에서 지역전문가로의 길에 대한 정부 지원은 매우 적극적이고 체계적이다. 정부와 대학의 협력을 바탕으로 지역전문가를 양성하는 구조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탄탄하다. 미국은 정부 부처와 산하 연구재단이 중심이 돼 매우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광범하게 가지고 있으며, 대학이 실행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선순환 구조로 돼 있다. 지원 분야도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을 포함해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넓게 잡고 있다.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다. 경제 대국 중에 한국만큼 해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도 별반 없다. 경제 성장의 출발부터 해외 시장을 향한 수출 지향 산업화 전략이었고, 이런 경로는 시간이 갈수록 더 확대 강화되고 있다. 2021년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비율이 84.8%에 이른다. 오늘날 경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외교 역시 경쟁과 협력의 복잡한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최근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쾌거를 이루는 한류는 확장적 세계화의 결실이다. 해외 의존도가 이렇게 높은 나라에서 지역전문가를 양성하지 않는 것도 기이하고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윤석열정부는 국격에 걸맞은 글로벌 중추 국가의 역할 강화를 국정 과제로 삼고 있다. 이에 발맞춰 내년도 공적개발원조(ODA)를 4조5000억원 규모로 대폭 확대하는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전년 대비 14.2%의 큰 폭 증가다. 전체 예산이 삭감되는 상황을 참작하면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글로벌 중추 국가의 국정 과제 실현은 미시적 수준에서 지역전문가의 넓은 뒷받침 없이는 완성도 높게 이뤄지기 어렵다.
요즘 우리 학생들은 해외 활동에 대한 관심이 많다. 크게 보아 두 영역에서의 활동이다. 하나는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 봉사 활동이다. 여기에서 빠져있는 것이 해외 지역전문가의 길이다. 특정 지역을 세밀하게 연구해 지역전문가가 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지역 언어 습득은 물론이고 인문학을 두루 넓게 알면서 특정 전공 연구 분야에도 깊은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만큼 공부 자체가 매우 힘들다. 그런데 더욱 힘든 것은 이런 공부를 하겠다고 나서더라도 지원 정책이 없다는 점이다. 지역전문가를 만드는 생태계가 전혀 형성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글로벌 중추 국가의 초석은 풍부한 지역전문가에 의해 탄탄하게 놓인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정부 차원에서 이에 대한 개념은 별반 없어 보인다. 한때 한국연구재단이 세계화의 국정 슬로건 속에서 조금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하더니만 오래가지 못했다. 지역전문가가 점점 더 필요해지는 상황인데 이를 뒷받침할 정책은 완전히 끊겨 있는 셈이다.
세계 국가의 꿈을 갖고 있다면 지역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인재 양성은 긴 호흡이 필요하다. 지역전문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역전문가를 양성하는 생태계의 구축 없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의 비전은 외양만 있지 실체는 매우 취약한 구조일 수밖에 없다. ODA 확대와 같은 거시적 시야와 지역전문가 양성과 같은 미시적 접근 모두 필요한 시대다.
박길성(고려대 명예교수·지속가능미래 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