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구금되거나 감옥에 간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자 무효이지만,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되지 않는다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판례가 7년여 만에 뒤집힌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30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긴급조치 9호)는 박 전 대통령 집권 때인 1975년 시행됐다.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등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사건 피해자들도 긴급조치 9호 위반을 이유로 불법 체포·구금돼 수사를 받았다.
대법원은 2013년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긴급조치 9호를 위헌·무효로 판단했고,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9월에는 위헌적 긴급조치 9호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냈다.
1심과 2심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2015년 3월 선고된 대법원 판례 때문이다. 당시 대법원 3부는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며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이지만, 민사상 불법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7년 만에 판례를 변경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그에 따른 강제수사와 공소제기, 유죄판결의 선고를 통해 현실화됐다”며 “개별 국민이 본 손해에 대해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긴급조치 9호의 발령과 적용, 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이 전체적으로 불법행위를 구성하므로 개별 공무원의 구체적인 고의·과실을 따지지 않아도 배상 책임이 성립한다는 뜻이다.
주심인 김재형 대법관은 별개의견에서 “이 판결로써 우리 사회가 긴급조치 9호로 발생한 불행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로 아직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들에게 국가 배상의 길이 열리게 됐다. 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들에도 이날 판례 변경이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올 초 기준 긴급조치 9호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은 대법원에 24건, 하급심에 9건이 진행 중이다. 다만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들이 다시 소송을 내 구제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은 환영의 입장을 냈다. 다만 “똑같이 피해를 봤는데 누구는 국가 배상을 받을 수 있고, 누구는 배상 길이 막힌 이중적 상황”이라며 “국회가 특례법 등 입법 조치를 추진해 달라”고 촉구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