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선 “먹튀” 한편에선 “전략”… 론스타 6조원대 소송 교훈은

입력 2022-08-31 04:06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6조3000억원대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의 결론이 제시된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제소 시기인 2012년 11월 이후로 따지면 9년9개월,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최초로 통고문을 보낸 2012년 5월 이후로는 10년3개월 만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전례와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최종 판정까지는 통상 3~4년이 걸린다”고 예상했다. 분쟁 대응 기간은 그 3배로 늘어났는데, 전문가들은 양측의 밀고 당기기가 치열했다거나 공개되지 않은 막후 협상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는다.

한국 시장에서 큰 차익을 거두고 떠난 론스타의 중재심판에 대해 국내외의 시각은 크게 엇갈렸다. 국내에서는 부도덕한 해외 자본이 한국 시장을 놀이터로 삼았다는 ‘적반하장’ 여론이 힘을 얻었다. 반면 외신은 동시에 “한국 시장의 개방성에 의구심이 있다”는 평가를 내놨다. 시간이 흐르며 국내에서의 ‘먹튀’가 다른 한편에서는 투자자의 지혜로운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국민정서를 걷어내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반성론도 서서히 제기됐다.

학계는 ISD 중재심판의 결론을 ‘승소’나 ‘패소’로 규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판정에 따라 정부가 해외 투자자에게 비용을 물어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승패 개념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에 내민 청구서에 적힌 46억7950만 달러는 2012년에는 5조원대로 보도됐었다. 현재는 환율 변동과 함께 6조원을 넘었다.

“감정적 차별대우 받았다”는 론스타

론스타가 ISD를 제기하며 펼친 주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외환은행 주식 매각을 지연시켜 하나금융지주에의 ‘헐값’ 매각이 불가피했으며 이로 인해 큰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론스타는 2006년 KB금융지주, 2007~2008년 HSBC와의 주식매매 계약이 파기된 이면에 한국 정부의 고의 지연이 있었고 이는 한-벨기에 투자보장협정(BIT) 위반이라고 강조해 왔다. 둘째는 한국 국세청의 양도차익세 부과 조치가 한-벨 BIT의 이중과세 금지조항에 위배되는 자의적 과세였다는 주장이다.

론스타는 이런 주장들을 보강하기 위해 한국 여론으로부터 피해를 보았다는 취지의 주장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론스타의 중재의향서에는 한국 정부는 물론 정치권과 언론까지 국민합의를 운운했고, “‘먹튀’를 못하게 해야 한다”는 공언이 이뤄졌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한국 정부의 조치가 법적 근거에 기초했다기보다는 감정적이었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론스타는 한국 정부가 수사나 감사로 본인들을 부당하게 괴롭혔다는 취지로도 주장했다.

정부 “내외국민 동등 대우, 차별 없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중재심판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대응 기조는 한 줄이다. “론스타와 관련된 행정조치를 함에 있어 국제 법규와 조약에 따른 내외국민 동등 대우 원칙에 기초, 차별 없이 공정 공평하게 대우했다”는 것이다. 학계는 짧은 대전제 속에 적힌 ‘동등 대우’에 정당한 대응·징벌이라는 정부의 반박 논리가 함축돼 있다고 본다. 정부의 외환은행 인수 허가 과정, 외환카드 허위 감자설 유포 등에 대해 한국 검찰의 수사가 있었으며 수사·소송 중 매각 승인이 지연되는 점은 불가피했다는 논리를 펼쳤을 거라는 관측이다.

론스타가 내야 했던 8500억원대 세금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법원은 정당하다는 판단을 이미 마쳤다.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사고판 회사는 벨기에 법인 ‘스타홀딩스’이며, 한-벨 BIT에 따라 세금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문제는 이 벨기에 법인의 성격이었다. 한국 세무 당국은 “론스타가 내세운 벨기에 법인은 면세 혜택을 받기 위한 페이퍼컴퍼니일 뿐”이라며 과세가 정당하다고 반박했다. 대법원 역시 관련 사건에서 “벨기에 법인은 론스타펀드가 국내에서의 조세회피를 위해 설립한 ‘도관회사’에 불과하고 양도소득의 실질귀속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누군가의 책임? 모두의 교훈

학계 연구자들이 최악의 경우를 따진 중재심판 시나리오는 ‘국민 1인당 추가 세금 10만원’이었다. 이 금액은 최근 ‘1인당 12만원’으로 올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문가들은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는 말을 많이 했다. 론스타에 물어줄 돈을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미 상당한 세금이 소송 비용으로 지출됐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법률자문을 요청한 다국적 로펌 변호사들이 받아간 돈은 한때 ‘시간당 660달러’로 정보공개가 이뤄졌다. 오랜 기간 론스타 사태를 다뤄온 송기호 변호사는 이 대목에서 “(수임료) 혈세 부담은 10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10년 가까이 흘러온 중재심판의 결론은 한국 정부의 조세 정책은 물론 대법원 판결마저 무력화하는 내용일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누군가의 정치적 책임으로 추궁할 것이 아니라 각계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003년 론스타를 산업자본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렸을 때의 잘못을 되새기고, 경제 세계화 속에서는 국가의 정책과 법령을 보다 명확하게 다듬어야 한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제통상 분야 교수는 “국제적 수준에 맞지 않는 시스템은 비싼 대가를 치른다”며 “비싼 수업료를 정당한 규제 제도를 만드는 데 활용하면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