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시를 읽는 이유

입력 2022-08-31 04:02

지난여름 특별한 강의를 기획했다. ‘문학과 다큐멘터리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문학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매주 한 편씩 OTT 보다(VoDA)에서 시청한 뒤 모여서 감상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동화작가 타샤 튜더의 아름다운 정원과 그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타샤 튜더’,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 D 샐린저의 미스터리한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샐린저’, 그리고 시를 주제로 한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더해 총 5편을 선정했다. 매주 목요일 5주 동안 허희 문학평론가가 다큐멘터리를 문학으로 읽어보는 강의 길라잡이가 돼 주었다.

유난히도 폭우가 잦아서 심각한 수해까지 입었던 이번 여름의 강의 첫날, 오후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기 고양시에서도 교통이 불편한 외진 곳인지라 찾아오기에 불편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비까지 쏟아지다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처음 만날 수강생들을 기다렸다. 하나둘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면면은 다양했다. 최신형 아이패드를 펼치고 강의 내용을 열심히 필기하는 20대 대학생, 아이들 키워 놓고 이제 자신만의 취미를 찾아 저녁시간을 보내는 40대 주부, 그리고 귀 밑머리 희끗희끗해지는 60대 초반 남성까지 스무 명 남짓 수강생이 강의실을 채웠다.

목요일마다 눈을 뜨면 오늘 날씨는 어떤가 기상 예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일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대비가 퍼붓던 어느 저녁에는 급히 강의를 취소해야 할까 고민도 했다. 실제로 그런 날에는 많은 수강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무료 강좌인 데다 어떤 강제성도 없는 자유로운 강연이고 비까지 내리니, ‘나 같아도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을 거야’ 생각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매주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는 60대 남성 한 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도 어김없었다. 미처 우산으로도 가리지 못한 양쪽 어깨가 비에 다 젖은 채 강의실로 들어서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들어 목례를 건넸다.

약속했던 5주가 흐른 뒤에는 어느새 여름이 저만치 성큼 물러나 있었다. 마지막 다큐멘터리는 ‘시인할매’였다. 전남 곡성 서봉마을, 팔십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던 할머니들이 ‘길작은 도서관’에서 뒤늦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뒤 자신의 삶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그것도 시(詩)로. 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도/ 잘 살았다/ 사박사박. 윤금순 할머니가 삐뚤삐뚤 달력 뒷장에 써 내려간 ‘눈’이라는 시는 호된 시집살이와 가난, 그리고 설움의 나날을 원망하고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그 긴 시간을 살아낸 자신에 대한 따뜻하고 담백한 위로의 말들이 우리의 마음에도 눈처럼 내려앉아 다독인다. 마지막 강의가 끝난 뒤 강의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매주 결석 한 번 없던 60대 남성분이 다시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래도 꼭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가던 길을 돌아 다시 왔습니다. 지난 5주 동안 강의 잘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평생을 엔지니어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은퇴를 하고 책이나 영화도 좀 보려 하는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제 이웃사촌이 유명한 시인이에요. 이분과 얼마 전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꾸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신청했었죠. 사실 오늘 낮에 집 근처 도서관에 들러서 새로운 강의를 하나 등록하고 왔어요. ‘글쓰기 강좌’인데요. 이제 제 인생을 글로 써볼 수 있을까 하는 용기가 조금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우리는 왜 문학을 읽고 영화를 볼까.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고 했던 박완서 작가의 ‘시를 읽는다’에서 답을 찾는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글을 써보겠다며 발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에서도.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