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겨울이 더 혹독해진다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세계적 반도체 설계업체 엔비디아는 게임과 가상화폐 수요가 줄면서 ‘어닝 쇼크’ 실적을 내놨다. 반도체 업계의 ‘비관론’이 현실화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실적 눈높이를 낮추고 설비투자에서 손을 거둬들이며 ‘겨울 채비’에 들어갔다.
29일 외신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올해 2분기 조정 주당순이익(EPS) 0.51달러를 기록했다. 시장 전망치(1.26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매출액은 67억 달러로 예상치(81억 달러)를 한참 밑돌았다. 게임사업 부진이 직격타를 날린 것으로 분석된다. 엔비디아의 게임사업 부문 매출은 1년 전보다 33%나 급감했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의 실적 하락이 시장 분위기를 상징한다고 판단한다.
엔비디아는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기업이다. 주력은 그래픽 저장장치(GPU)다. GPU는 게임기, 가상화폐 채굴 등에 쓰인다. 엔데믹에 접어들면서 야외 활동이 많아지고, 경기침체 우려로 전자제품 수요가 크게 감소하면서 게임 산업은 위축하고 있다. 여기에다 가상화폐 가치 급락으로 채굴을 위한 GPU 수요도 꺾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잇따라 ‘수요 절벽’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 전체의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라고 말했다.
시장조사 기관들은 이미 반도체 비관론을 내놓고 있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는 지난 6월에 발표한 ‘세계 반도체 시장 성장률 전망’을 최근 수정하면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6.3%에서 13.9%로 낮췄다. 내년 성장률도 5.1%에서 4.6%로 하향 조정했다. 메모리 반도체의 실적 악화 관측이 두드러진다. WSTS는 메모리 시장의 올해 성장률을 당초 18.7%로 내다봤지만, 이번 발표에서 8.2%로 크게 낮췄다. 내년 전망치도 3.4%에서 0.6%로 대폭 내렸다.
기업들은 설비투자 계획을 조정하면서 ‘겨울나기’를 준비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8일 실적 발표에서 “(반도체를) 유연하게 공급하고 단기 설비투자 계획도 여기에 맞춰 탄력적으로 재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충북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43만3000여㎡ 부지에 4조3000억원을 투자해 조성하기로 한 M17 공장 증설을 보류하기로 했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도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최대 44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로 하향 조정했다.
미국 마이크론은 지난달에 “향후 여러 개 분기에 걸쳐 공급 증가를 조절하기 위해 조정 중이다. 신규 공장·설비투자를 줄여 공급 과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올해 전 세계 반도체 신규 설비투자 전망치를 1855억 달러로 기존(1904억 달러) 대비 약 2.5% 내렸다. 전년 대비 연간 성장률 전망치도 24%에서 21%로 낮아졌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