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에서 기술력을 확보해 초격차를 실현하는 게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동시에 첨단 기술이 안보 문제로 확대하면서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력도 필요해지고 있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은 전 세계 시장에서 70%를 넘는다.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가 없으면 전 세계의 주요 산업은 멈춘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본격적으로 견제하면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여 난처한 상황을 맞고 있다. 미국은 한국 대만 일본과 함께 반도체 안보동맹인 ‘칩4’를 구축하려고 한다. 전 세계 반도체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한국과 대만을 통해 중국을 확실하게 견제하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중국 업체을 주요 고객사로 두고 있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셈법이 한층 복잡해졌다.
미래 자동차 산업의 ‘게임 체인저’로 떠오른 전기차를 둘러싼 국제 흐름도 한국 기업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만들고 자국 안에서 조립되는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 점유율을 높여가던 현대자동차그룹에는 초대형 악재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전기차 배터리의 경우 중국산 소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요 광물의 상당수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대체 소재’ ‘대체 공급망’을 만들어야만 생존을 장담할 수 있다.
이에 기술 격차를 벌이고 기존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전략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로버트 도너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세계경제연구원에서 ‘글로벌 공급망 이슈 진단과 세계경제 안보 전망’을 주제로 연 웨비나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수출 중심 국가와 기업들에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는 주요 생산시설을 비롯한 공급망과 목표 시장의 대안을 찾는 다변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 편에 서는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면 자유무역, 투명한 공급망 구축 같은 원론에 충실하고 복원력이 강한 공급망을 스스로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