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음식을 준비하던 중 손목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상처는 검붉은 흉터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흉터’라는 단어의 어원은 알려진 바 없지만 ‘흉(凶)’이 남은 ‘터’를 뜻하리라는 합리적 추측이 있어 왔다. ‘흔적’은 흔적 흔(痕)에 자취 적(迹)을 쓴다. 사물이 있던 ‘자리’라는 뜻이다. 흉터와 흔적이라는 단어에 모두 공간적 개념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흉터가 공간이라니. 흉터의 상위 개념인 흔적 역시 그런 뜻을 내포한다니. ‘상처가 있었고, 그것이 회복됐음’을 증명하는, 상흔의 역사가 가시적으로 기록돼 있는 몸의 일부가 ‘흉터’라 불린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동시에 어딘지 쓸쓸하다.
황정은 소설가의 에세이집 ‘일기’ 중 ‘흔’이라는 제목을 지닌 목차의 내용에는 열두 살에 그의 얼굴에 생긴 파란색 흉터에 대한 사연이 적혀 있다. 작가에게 이 흉터는 오랜 시간 자기 혐오와 수치심의 원인이었으며 그렇게 느끼게 된 데에는 자신의 흉터를 흠으로 여기던 주변의 말과 시선이 당연하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흉터를 흠이라 여기지도, 어린 시절의 자신을 탓하지도 않게 됐다 말한다. 그런 극복에 관해 단순히 언급하는 문장의 이면에서 얼마나 많은 분투가 있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뉴스를 보다 어느 순간 견딜 수 없어 채널을 돌린다. 하나의 몸은 어떤 상처는 완료되고 어떤 상처는 진행 중인 흉터의 덩어리 같다. 모두가 누적된 트라우마의 공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내 몸을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완료된 상처들과 그럼에도 흉터로 남은 것들이 공존한다. 안미린 시인의 시 ‘초대장 박쥐’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린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장소가 바로 흉터야.” 우리는 모두 각각의 흉터를 가지고 있지만, 그곳이 가끔은 근원이 되는 상처의 형태로부터 이탈해 재탄생된 곳이기를 바란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