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과 회화 분야에서 각각 한 시대를 대표했던 원로 작가 엄태정(84)과 송번수(79)가 동시에 개인전을 갖고 있다.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뮤지엄은 가을 기획전으로 엄태정 개인전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을 마련해 내년 2월까지 한다. 화업 형성기인 1960년대 제작한 미발표작과 드로잉, 70~80년대 작품을 신작과 함께 내놓았다.
엄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 재학시절 철의 물질성에 매료돼 금속 조각의 길로 들어섰다. 영국 유학을 계기로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1876~1957)의 영향을 받아 추상 조각 작가가 됐다. 60년대에는 격정적인 앵포르멜(비정형 미술) 경향의 작품을 선보였지만 노년이 돼 제작한 작품들은 고요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뮤지엄 측은 “엄태정 작가의 작품은 금속이 차갑고 무겁다는 속성을 잊게 할 만큼 주변을 포용하듯 시적이고 온화하다”고 설명했다.
최신 작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2022)은 두 개의 긴 직사각형 알루미늄 패널 사이에 철로 제작된 타원 고리 두 개가 수직, 수평으로 끼워진 작품이다. 작가는 “두 개의 알루미늄 패널은 낯선 자의 은빛 날개다. 은빛 날개 사이에 펼쳐지는 무한한 공간은 낮과 밤을 모두 품는다”고 말했다.
용산구 갤러리바톤은 반세기에 걸쳐 화업에 매진하는 송번수 화백의 개인전 ‘네 자신을 알라’를 다음 달 24일까지 한다. 그는 70년대 전업 작가 초기에는 판화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발표한 실크스크린 작품 ‘판토마임’ ‘공습경보’는 한국 팝아트의 효시로 여겨진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태피스트리 작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특히 태피스트리에 가시를 넣어 가시가 천을 뚫고 나가는 형상을 통해 내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번 전시에는 나무 가시를 모티브로 삼아 이를 평면 작업으로 발전시킨 회화 ‘가능성’ 연작을 내놓았다. 평면에 직접 채취한 가시를 달거나 가시 모양으로 가공한 나무를 붙여 만든 회화는 붓질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물컹거리는 상처 그 자체를 마주하게 한다.
작가는 “장미의 실체가 가시인 것 같았다. 가시에 많은 철학이 들어 있어 지금까지 가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수의 면류관에서 착상한 가시는 전쟁, 사회적 갈등, 피폐함 등에 대한 도상적 은유로 확대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