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헌트’는 1983년 미국 워싱턴DC를 방문 중이던 한국 대통령에 대한 암살 기도로 시작된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내부에 침투한 북한 고정간첩 ‘동림’이 대통령 동선을 노출했다고 보고 색출에 나선다. 국가 원수 암살 시도는 스릴러물의 단골 소재다. 여기서 테러범들이 사활을 거는 게 타깃의 동선 확보다. 1973년 개봉된 영화 ‘자칼의 날’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 암살 계획을 다뤘는데 1962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드골 대통령의 알제리 독립 방침에 분노한 군인들이 엘리제 궁 내부의 협력자로부터 동선 정보를 얻은 뒤 대통령 부부가 탄 차를 공격했다.
국가 원수의 유고나 위해는 국가 비상사태를 초래하기에 대통령 동선은 경호실 최고의 기밀사항이다. 하지만 엉뚱한 노출이 왕왕 발생한다.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를 방문했다가 피격 사망했다. 리 하비 오스왈드가 댈러스 신문에 상세히 보도된 대통령의 퍼레이드 동선을 본 뒤 범행을 저질렀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허무하게 뚫렸다. 요즘엔 SNS가 골칫덩이다. 2017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시구자로 나섰다. 청와대는 시구 직전까지 ‘비보도’를 요청했는데 정작 행사 2~3시간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식이 퍼졌다. 2018년 12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라크 미군기지 방문도 사진 공유사이트를 통해 미리 알려졌다.
지난 24일 김건희 여사 팬클럽에 윤석열 대통령의 방문 일정이 노출돼 시끄럽다. 몇 시간 전도 아닌 행사 이틀 전에 장소, 시간이 버젓이 공지됐다. 초비상이어야 할 대통령실은 “당원에게 알음알음 알려진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당원 내부에 ‘동림’ ‘자칼’ 같은 이가 잠입해 있다면 어쩔 건가. 대통령 SNS엔 여당 대표 뒷담화가 담겨 있고 여사 팬카페엔 국가 기밀이 넘실댄다. 지난 정부 때 ‘내로남불(Naeronambul)’이 옥스퍼드 사전에 올랐다는데 이제 ‘콩가루(Konggaru)’가 등재될 차례인가.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