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어머니, 집에 오신대요. 근데 저희가 저녁에 일이 있거든요.” “알았다. 내가 가서 사돈이랑 저녁 해서 먹을게.”
우리 어머니와 우리 엄마는 이런 사이다. 자식들이 집에 없어도, 두 분끼리 만나 오순도순 밥을 드신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어머니, 이번 주말에는 엄마도 모시고 갈 거예요.” 이번엔 시어머니가 따끈한 밥을 지어 놓고, 사돈이 오기를 기다리신다.
두 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여자 셋이 3박4일간 제주도 여행을 한 적도 있다. 비슷한 꽃무늬 블라우스에 챙이 까만 플라스틱 캡을 쓰신 어머니들은 종일 수다를 떨다가, 졸다가 하셨다. 식당에 모시고 들어가면, 주인들이 죄다 궁금하게 쳐다봤다. 모녀끼리 여행 오는 사람은 많아도, 고부가 오는 것은 보기 힘든 광경이란다. 더군다나 딸이자 며느리가 사돈 두 분을 모시고 오는 건 처음 봤다나. 우리 집에선 자주 일어나는 행사다. 엊그제 여름휴가도 두 분이랑 함께 다녀왔으니까.
심지어 지난 추석에는 아예 두 어머니가 명절을 함께 보냈다. 시아버지 차례를 지내자마자 나이든 어머니 혼자 두고 나서는 게 영 맘이 짠했다. 그렇다고 하루 더 머물자니 혼자 계실 엄마 쪽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다 못해 아예 엄마를 모시고 시댁에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돌아가신 아버지들 제사보다 지금 살아계신 어머니들 편의가 우선이지 싶었다. 넓은 마당이 있는 시골집에서 명절 내내 가족이 다 같이 머물렀다. 왔다갔다 할 일이 없으니 자식들 맘이 한가롭고 편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주위 사람들은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워한다. 며느리 입장에서 시댁이나 시어머니가 불편하지 않다는 건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이가 사돈 간이라는데 두 어머니는 어찌 그리 잘 지내시는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뭐 별다르겠는가. 시금치의 ‘시’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때가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곁에서 아기를 돌봐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 일 년에 몇 번 보는 어려운 고부 사이로 지냈을 게 뻔하다.
물론 어머니가 어른답고 자비로운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이 큰 역할을 했다. 그 마음을 받아들여 나는 단순하고 대범하게 살자고 맘을 바꿔 먹었다. 아이를 맡겨 놓고 출근하는 것만도 힘들어 죽겠는데 시댁 눈치를 보거나 격식을 차릴 여유가 없었다. 내 멋대로, 어머니도 엄마랑 똑같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몸이 힘들면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누웠다. 때론 어리광도 부렸다. 대신 공치사 없이 자식의 도리를 묵묵히 했다.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두 여자는 고부라기보다 일종의 동지처럼 변해 갔다.
어머니는 한 달이면 서너 번 꼭 나가야 할 볼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구원군이었다. 두 분끼리 알아서 스케줄을 조정해 가면서 아이를 돌봐주셨다. 시부모님이 시골에 정착한 뒤로는 엄마가 ‘손주 돌봄’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두 분이라고 불편한 점이 왜 없었겠는가. 아마도 ‘자식들 힘들지 않게 우리가 좀 희생합시다’라는 부모 맘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니 맞벌이하는 주부로서 나는 얼마나 큰 덕을 본 셈인가. 늘 비실비실하고 연약했던 며느리이자 딸이 오늘날의 마녀체력이 된 데는, 특히 육아를 나눠주신 두 어머니의 힘이 컸다.
막장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사돈들을 보라. 서로 무시하거나 시기한다. 결혼식 때 말고는 평생 볼일이 없을 정도로 어려워한다. 그런데 금쪽처럼 귀한 자식과 손주를 공유한 사이가 사돈 아닌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아량을 베풀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한다면 우리 어머니들처럼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두 분을 본받아 나 역시 사돈이 생기면 친구처럼 잘 지낼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그럼 뭐하나. 하나 있는 아들이 결혼에 별로 뜻이 없는 것 같다. 요즘처럼 비혼이 넘치는 세상에, 사돈 있는 분들은 복 받은 줄 아시라.
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