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SF 작가 그렉 이건(61)을 국내 독자에게 정식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이건이 1990년대 발표한 중·단편 11편을 골라 묶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표제작인 ‘내가 행복한 이유.’ 이거 한 편만 읽어봐도 왜 이건이 미국의 테드 창(55)과 함께 21세기를 대표하는 SF 작가로 불리는지 이해하게 된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악성 뇌종양 제거 수술의 후유증으로 행복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 주인공이 인공뇌(의뇌)를 이식받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뇌 이식에 이르는 과정은 현실적이고, 유전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이용하는 인공뇌는 구체적이다. 인공뇌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작동하는 원리는 뇌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꾸며낸 이야기지만 현재 세계의 어느 첨단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다가온다. 작가는 지금 독자가 읽고 있는 것이 SF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할 정도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면서 의뇌를 통해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지 파고든다.
맨 앞에 실린 ‘적절한 사랑’은 끔찍한 사고를 당한 후 뇌만 온전한 남자가 복제 몸에 뇌를 이식해 다시 살아가는 이야기다. 남자의 뇌는 복제 몸이 완성되기까지 2년간 아내의 자궁에 보관됐다. 자신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난 남자, 뇌는 똑같지만 몸은 완전히 달라진 이 남자를 아내는 과거처럼 남편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두 작품은 첨단 과학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적극 활용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SF의 지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건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대학병원 부속 의학연구소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83년 데뷔한 그는 92년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 ‘쿼런틴’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휴고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등 세계적 SF상을 받았다.
김남중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