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찾으러 갔다가… 죽도록 맞아” 형제복지원 수용자 눈물

입력 2022-08-25 04:05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박순이(왼쪽)씨가 2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지켜보며 울고 있다. 이날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결론 지었다. 뉴시스

박경보(58)씨는 여섯 살이던 1969년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쌀을 팔고 오겠다”던 아버지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보육원을 전전하던 그는 1975년 다른 시설에 보내진 두 살 터울 형을 찾기 위해 무작정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역 대합실을 빠져나온 박씨를 기다리는 건 ‘부랑인 단속반’이었다. 단속반에 붙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머리카락이 밀리고 옷도 벗겨졌다. 찾아 헤매던 형은 그보다 먼저 그곳에 끌려와 있었다.

박씨는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결론 낸 24일 기자회견에서 “국가가 우리의 피해를 인정하는 날이 와서 기쁘다”며 “모든 피해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형제복지원 수용 당시 6번이나 탈출을 감행했지만 매번 붙잡혔다. “죽도록 맞았다”며 “잡혀왔을 때는 하도 맞아서 오른쪽 허벅지 뼈가 부러진 적도 있다”고 떠올렸다.

김병용(67)씨도 20대 청년이던 1982년 4월 일자리를 구하러 부산진역에 갔다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죄가 없는 사람은 바로 풀려난다”는 말을 믿고 트럭에 몸을 실었지만, 이후 1년이 지나 아들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찾아오고 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김씨는 “강제노역에 동원됐는데 쉴 틈 없이 커다란 돌을 망치로 내리쳐야 했다”며 “하루의 마지막은 늘 ‘매타작’이었다. 시설 관계자는 일을 가장 적게 한 15명을 곡괭이로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로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새 인권침해 사실들도 확인됐다. 반항하는 수용자에게 ‘클로르프로마진’과 같은 신경억제제를 강제로 투약한 것이 대표적이다. 경찰이 경범죄를 저지른 소년범들을 소년부에 송치하는 대신 형제복지원에 직접 강제수용시킨 사례도 처음으로 발견됐다. 부산 서부경찰서에서 1986년 작성한 ‘소년범죄사건처리부’에 따르면 당시 소년 절도범 3명은 ‘본적 없는 고아’라는 이유로 형제복지원에 인계됐다. 당시 부산에서 근무했던 한 경찰은 진살화해위 조사에서 “경찰이 거리를 떠도는 소년을 발견하면 형제복지원에서 처리했다”고 증언했다.

이번 조사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공식 인정됐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자 개개인이 국가배상 청구 절차를 밟아야 하는 점은 한계로 남았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은 “배상·보상은 개별 소송을 통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며 “진실규명 결과가 소송에서 유용한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민지 이의재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