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에 갇히다… ‘블로킹 고기압’에 전 세계 몸살

입력 2022-08-27 04:09
사진 왼쪽부터 호우에 수문 연 팔당댐, 강남역 일대 폭우 피해, 말라 붙은 중국 포양호수, 물길 끊긴 프랑스 루아르강. 연합뉴스·국민일보DB·AFP연합뉴스·로이터연합뉴스

국내에서 115년 만에 폭우가 쏟아져 큰 피해를 입었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인 유럽에선 기록적 가뭄으로 신음하고 있다. 라인강과 다뉴브강 등 유럽의 주요 수계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물류에도 큰 차질이 빚어지는 상황이다. 서로 상반되는 가뭄·폭염과 폭우의 근본적인 배경으로는 지구 온난화 등 기후변화가 거론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거대한 공기 기둥인 ‘블로킹 고기압’이 유라시아 대륙에 형성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럽은 500년 만의 최악의 가뭄 탓에 경제·사회적 피해가 급속도로 불어나는 중이다. 독일연방수문학연구소(BfG)는 지난 19일(이하 현지시간) 라인강의 수위가 대표 측정 지점인 독일 카우프 기준 32㎝까지 떨어졌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도 “라인강 수위가 떨어지면 화물선은 좌초를 방지하기 위해 하중을 낮춰 항해해야 한다”며 “최근 일부 화주들은 약 4분의 1의 화물만 선박에 적재하고 있다”고 심각한 상황을 전했다.

라인강은 서유럽 내륙 수상 운송의 80%, 독일 내 에너지(천연가스·석탄·원유) 운송의 30%를 담당하는 서유럽 물류의 핵심 동맥이다. 프랑스 루아르강, 이탈리아 포강 등 유럽 주요 하천들도 농업용수 및 산업용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에너지난도 문제다. 영국 BBC는 지난 13일 유럽에서 수력발전을 통한 전력 생산량이 20%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에선 원전 가동률도 현저히 떨어졌다. 원자로를 식힐 냉각수가 부족해진 때문이다.

역대급 가뭄 피해는 유럽 대륙 상공에 자리 잡은 저지고기압, 즉 블로킹 고기압의 형성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럽 대륙은 지난달부터 두 달 가까이 강력한 고기압이 머물며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구름이 없으니 햇볕에 의한 가열이 지속되고, 고기압 내 하강기류 효과까지 더해져 폭염과 가뭄을 심화시켰다.

통상 기압계는 지구 자전과 편서풍 영향으로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동쪽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고기압 옆에는 저기압이 따라오므로 각 지역은 맑은 날씨(고기압)와 흐린 날씨(저기압)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중위도에서 이러한 기압계 교체 주기는 통상 1주일이다.

그러나 공기가 강하게 팽창하면, 최근 유럽에 자리 잡은 고기압과 같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블로킹 고기압이 발생한다. 열기구를 띄우기 위해 불을 지펴 공기를 팽창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날이 지속되면 해당 지역의 공기는 팽창한다. 지면과 해수가 평소보다 뜨거워져 그 위의 공기를 데우면 공기가 부풀어 오르며 강한 고기압이 형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고기압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성묵 기상청 재해기상대응팀장은 “강한 고기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대기의 흐름(편서풍)을 만나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며 “게다가 정체된 고기압은 맑은 날씨를 지속시켜 지표면을 더욱 데우고, 이는 다시 고기압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발생해 고기압이 계속 강해지는 악순환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유럽에 강한 고기압이 자리하게 된 건 결국 기후변화에 따른 지면과 해수 온도 상승이 주된 이유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김 팀장은 “현재 북극의 온도가 평년과 비교해 섭씨 6도 가까이 높은 상황”이라며 “빛을 반사해주는 북극해의 해빙(海氷)도 평년보다 많이 적은 편”이라고 분석했다. 북쪽 찬 공기가 열기를 식혀주지 못하기 때문에 대기가 더욱 가열됐고, 이것이 블로킹 고기압 형성에 영향을 줬다는 설명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8일 최근 블로킹 고기압에 따른 기상 현상으로 115년 만에 가장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서울의 경우 관측 이래 최다 강수량을 기록했는데 이 역시 블로킹 고기압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북서쪽에서 내려오던 찬 공기는 원래대로라면 동쪽으로 일부 빠져나갔어야 했지만, 오호츠크해 부근에 자리 잡은 블로킹 고기압에 막혀 그대로 남하했다. 이 때문에 남쪽의 온난다습한 공기와 더욱 심하게 충돌했다.

공기 충돌 강도는 비구름대의 형태로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강하게 부딪칠수록 비구름대는 남북으로 폭이 좁고 동서로 긴 모양을 띠는데, 지난 8일 비구름대의 남북 폭은 12.8㎞에 불과했다. 서울시 남북 폭(30.3㎞)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은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구 온난화와 함께 블로킹 고기압이 갈수록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상청이 지난해 4월 펴낸 ‘우리나라 109년 기후변화 분석 보고서’를 보면 과거 30년(1912~1940년) 대비 최근 30년(1991~2020년)의 한반도 연평균 기온은 1.6도 올랐다. 최고기온과 최저기온 역시 각각 1.1도, 1.9도 올랐다.

블로킹 고기압이 지표와 해수의 고온을 배경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반도와 그 주변 역시 블로킹 고기압이 빈발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우진규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블로킹 고기압이 기후변화와 함께 더 자주 생길 가능성이 있다”며 “해수면과 지표면 온도가 높아지면서 고위도로 올라올 일이 없던 따뜻한 공기들이 찬 공기를 타고 올라가 대기를 풍선처럼 부풀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와는 다른 기상 조건으로 이상 기후가 일상화될 가능성이 큰 만큼 우리 사회의 대비 태세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준이 부산대 기후과학연구소 교수는 “온난화가 심화하면서 대기 순환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블로킹 고기압의 발생 빈도와 강도가 증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많다”며 “실제 관측치를 봐도 지구 곳곳에서 고기압 시스템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탄소중립에 이르기 전까지는 온난화 심화로 이상 기상 현상이 더욱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만큼 사회가 폭염과 가뭄, 폭우 등 현상에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명진 기자 a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