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배우의 예술,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연극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큰지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그 순간에만 가능한 일회성, 관객과 함께하는 현장성을 특징으로 하는 만큼 배우의 힘에 따라 공연이 좌지우지된다.
최근 연기 경력만 최소 50년 이상인 원로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 무대가 잇따라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매년 2월 원로 연극인들을 위한 ‘늘푸른 연극제’가 개최되는 등 원로 배우들의 무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티켓 구하기 경쟁이 붙을 정도로 화제의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오징어 게임’ 이후 무대 돌아온 오영수
원로 배우들의 무대에 대중적 관심을 불러온 결정적 계기는 지난해 말 이순재(88)의 ‘리어왕’과 올 초 오영수(78)의 ‘라스트 세션’이다. 이순재는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3시간이 넘는 셰익스피어 ‘리어왕’의 타이틀롤을 맡아 한 달 넘게 이끌었다. 65년 연기 인생을 쏟아부은 무대에 관객이 몰리면서 전석이 매진되자 이순재 주도로 앙코르 공연이 8회 추가됐다.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오영수가 연극 ‘라스트 세션’에 신구(86)와 함께 더블 캐스팅되며 대학로에 돌아온 것도 세간의 화제였다. ‘라스트 세션’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소설가 CS 루이스의 가상 논쟁을 다룬 2인극으로 두 달간 공연이 예정됐다. 개막 직후 오영수가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까지 받으면서 티켓이 바로 매진되자 2주간 공연이 연장됐다.
원로 배우들의 예술혼은 올여름 신시컴퍼니가 6년 만에 다시 올린 ‘햄릿’에서도 빛을 발했다. 2016년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초연된 ‘햄릿’은 당시 전무송(81) 박정자(80) 손숙(78) 정동환(72) 김성녀(72) 유인촌(71) 윤석화(66) 손봉숙(66) 등 원로배우 9명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올해 ‘햄릿’은 6년 전 원로 배우들이 조역과 단역으로 물러나고, 강필석 박지연 박건형 김수현 김명기 이호철 등 젊은 배우들이 전면에 나섰다. 원로 배우들의 묵직한 존재감을 앞세운 ‘햄릿’은 2016년 초연에 이어 올해 공연 역시 매진됐다. 한 달간의 공연 기간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으로 열흘이나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햄릿’은 그동안 국내에서 보기 어려웠던 대극장 연극의 매력을 관객에게 보여줬다.
올가을에도 국내 연극계의 원로 배우 열풍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순재 신구 박정자 오영수 정동환 백일섭(78) 노주현(76) 서인석(72) 등이 주인공을 맡은 연극들이 잇따라 관객을 찾아온다. 노주현 서인석 등 TV에서 주로 활동하던 원로 배우들이 마음의 고향인 연극 무대에 오랜만에 되돌아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영화로 유명한 ‘두 교황’, 연극 무대로
오는 30일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두 교황’(10월 23일까지)은 자진 퇴위로 바티칸과 세계를 뒤흔든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그 뒤를 이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우정을 다룬 작품이다. 독일 출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규율과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 성향이며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갖췄다. 반면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는 개혁파이며 서민적인 축구와 탱고를 좋아한다. 이 작품은 정반대 성격과 성향을 지닌 두 교황의 이야기를 통해 ‘틀림이 아닌 다름’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대본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다키스트 아워’ ‘사랑에 관한 모든 것’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세 차례나 지명된 앤서니 매카튼이 썼다. 2019년 8월 연극으로 초연되고 이듬해 영화로 제작됐다. 영화에선 명배우 앤서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가 각각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교황 프란치스코로 출연했다.
‘두 교황’은 영국 초연 이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라이선스를 얻어 공연된다. 원로 배우 신구는 서인석, 서상원과 함께 베네딕토 16세 역에 캐스팅됐다. 정동환은 남명렬과 함께 프란치스코 역을 소화한다.
시니어 버전 만든 ‘아트’와 ‘러브레터’
대학로의 스테디셀러 ‘아트’와 ‘러브레터’는 원로 배우들이 출연하는 ‘시니어 버전’을 특별히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원로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 대체로 고령화와 외로움 등 노인 문제를 담았던 것과 달리 이번엔 우정과 사랑 등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게 특징이다.
다음 달 17일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1관에서 개막하는 ‘아트’(12월 11일까지)는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대표작으로 35개국에서 공연된 히트작이다. 오랜 시간 이어진 세 남자의 우정이 허영심과 오만에 의해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다.
국내에서도 2003년 초연 이후 여러 차례 공연된 ‘아트’는 그동안 30~40대 배우가 주로 출연해 왔다. 이번에도 항공 엔지니어 마크 역에 조풍래 박은석, 피부과 의사 세르주 역에 최재웅 최영준 김도빈, 문구 영업사원 이반 역에 박영수 박정복이 캐스팅됐다. 이와 함께 원로 배우들이 출연하는 시니어 버전에 이순재 노주현 백일섭이 각각 마크, 세르주, 이반 역으로 캐스팅됐다. 50대 배우들이 출연하거나 성(性)을 바꿔 여배우 버전으로 만든 적은 있지만 70~80대 배우가 출연하는 건 처음이다.
오는 10월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하는 ‘러브레터’(11월 13일까지)는 미국 극작가 AR 거니의 대표작으로 남녀 주인공 앤디와 멜리사가 평생 주고받은 편지를 대사처럼 번갈아 읽는 형식의 연극이다. 배우들의 섬세한 읽기와 표현, 텍스트의 힘으로 관객에게 울림을 준다. 1989년 미국에서 초연된 이후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 등에 맞춰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95년 초연 이후 종종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올해 ‘러브레터’에는 안정과 모범적인 삶을 추구하는 앤디 역에 오영수 장현성, 자유분방한 예술가 멜리사 역에 박정자 배종옥이 캐스팅됐다. 원작은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난 초등학생 시절부터 멜리사가 죽는 50대까지를 다룬다. 따라서 원로배우 오영수와 박정자의 출연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평생 무대를 꾸준히 지켜온 두 사람은 71년 극단 자유에서 만난 이후 50년 이상 돈독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