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중독을 유발하는가.
한동안 게임계와 의학계는 이 주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해왔고 이에 따라 수년간 치열한 연구가 이뤄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비교적 중립적이었던 교육계뿐 아니라 중독 유발에 비중을 뒀던 의학계에서도 게임을 중독 물질로 분류할 근거가 사실상 없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게임 과몰입을 질병으로 관리한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결정과 상반되게 국내 연구는 “단정 짓기 어렵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다.
2019년 5월 WHO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총회에서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코드로 등재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게임이용장애는 ‘6C51’이라는 코드가 부여됐다. 이로 인해 각국 보건당국은 게임 과몰입을 치료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기준이 생겼다. 한국의 경우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가 5년마다 개정되기 때문에 2025년쯤 도입 여부가 판가름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진행한 연구의 면면을 살펴보면 게임이 중독을 비정상적으로 유발한다는 근거가 빈약하다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2019년 7월 국무조정실은 이와 관련해 민관협의체를 구성하고 게임이용장애 국내 도입의 적절성을 판단하기 위해 3개 주제로 연구용역을 진행했다. 쟁점은 게임을 중독 유발 물질로 규정할 근거가 있느냐다.
그런데 의학계 입장을 대변할 것으로 예상한 연구가 증거 부족을 이유로 도리어 게임계 손을 들어주는 결론을 내 적잖은 화제가 됐다.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등재의 과학적 근거 분석’ 연구 용역을 맡은 안우영 서울대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8월 보건복지부에 제출한 결과보고서를 통해 WHO가 게임이용장애 질병 등재 과정에서 참고한 다수의 연구 논문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표본 대표성을 확인하기 어려워 연구 결과를 일반화하는 데에 제약이 있다”는 의견을 냈다.
다른 연구에서도 게임이용장애의 부실한 근거에 대해 날 선 지적이 있었다. 지난달 15일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개최한 발표회에서 ‘게임이용자 패널 연구’를 맡은 조문석 한성대 교수는 게임 과몰입군이 대부분 1년 내에 호전됐다면서 “게임 과몰입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기보다 개인이 처한 내외적 특성에 따라 발현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WHO는 1년 이상 게임 관련 장애 행동이 지속되면 게임이용장애로 분류한다.
지난 6월 정부에서 발표한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에 따른 파급효과 연구’에 따르면 의료진 150명 중 97명(약 64%)은 게임이용장애 도입에 찬성했다. 다만 의료 전문가 대부분은 치료에 앞서 게임을 하게 되는 원인이나 공존 질환(함께 앓고 있는 질환)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공존 질환을 게임 탓으로 오인하면 제대로 된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 파급효과 연구에서 의료진 90%는 우울증 같은 공존 질환이 없는 게임이용장애 환자는 10% 미만이었다고 응답했다.
교육계도 신중론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추세다. 지난 17일 이상헌 의원이 전국 17개 교육청에서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 신중론을 택한 교육청은 6곳에서 11곳으로 늘었다. 찬성론은 7곳에서 3곳으로 줄었다. 특히 교육계는 게임이용장애 도입 시 학생을 ‘게임중독자’ ‘질병 보유자’로 낙인 찍어 또래 집단에서 차별을 겪는 부작용이 야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게임 산업계에선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도입이 ‘정책 실수’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 게임업계 고위 관계자는 “10년 전만 해도 게임을 질병으로 분류한다고 하면 사회적 합의가 비교적 원만히 이뤄졌을 테지만 지금은 국민 대부분이 게임을 여가생활로 여기고 있다”면서 “강제적 셧다운제가 폐지되고 대선 후보들은 게임 진흥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게임을 터부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더 이상 공감을 얻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 외국 게임사 관계자는 “한국은 ‘PC방판 신데렐라법(오후 10시 이후 청소년 PC방 출입 금지)’ 같은 사례 등이 있어 게임과 관련한 다소 황당한 정책에 대한 면역력이 높은 거 같다”면서 “일부 해외 국가에서는 ‘아직도 그런 게 있냐’는 식으로 조리돌림 당할 만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이다니엘 정진솔 윤민섭 기자 d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