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왜 악과 부정과 불의와 슬픔이 있을까.’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으로 지으셨는데, 세상엔 전쟁 폭력 모욕 불신 불평등 등 비참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질문으로 영혼의 깊은 밤 같은 시간을 보낼 때 ‘실낙원’을 만났습니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작가인 존 밀턴의 책인데 학교 과제로 읽어야만 했습니다.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실낙원’은 교회에서 예전부터 들었던 창조 이야기를 깊이 있고 아름답게 그려냈습니다. 창조 때 있었던 최초의 반역과 그 반역의 참여자였던 사탄의 심정까지 담아냅니다.
첫 전쟁에서 패배한 사탄이 다른 악마들에게 연설한 내용을 듣다 보면 이상하게 그가 말하는 승리와 영광에 마음이 동요합니다. 사탄은 더는 힘으로 하나님에게 대적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창조의 세상에 지은 ‘인간’을 몰락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고 영광을 준 자들을 무너뜨려서 역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에 흠집을 내자고 그는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계략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태초의 천사들이 질투할 정도의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걷고 말하고 세상을 배우는 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처음 경험하기에 아이처럼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알아갑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 안에서 청지기로 자라납니다. 하지만 사탄은 에덴으로 숨어들어오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호기심을 툭툭 건드립니다. 그리고 속삭이지요. “너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이 목소리에 그들은 선악과에 손을 뻗습니다. ‘실낙원’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베어 먹을 때 “대지는 다시 고통에 몸부림치듯 내장에서부터 흔들리고 자연도 다시 한번 신음”했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로 존재했던 태초의 세상은 고통으로 흔들리고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실낙원’은 비참으로 끝나지 않고 신의 중재,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희망을 남깁니다.
밀턴이 살았던 17세기 영국은 종교로 인한 분열이 존재했고, 왕과 귀족들은 서로에게 칼을 내밀었습니다. 그때 밀턴이 그려낸 ‘실낙원’의 세계는 잃어버렸던 본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그려내면서 이 세상에 대한 집착과 야망을 잠시 내려놓으라고 호소합니다. 과거를 동경하면서 미래를 향하게 이끌어 줍니다. 이 이야기 안에서 세상의 비참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남으면서 희망을 품게 합니다. 본향 즉 본래의 영광과 상태를 갈망하고 사모하게 합니다. 책을 덮고 바라본 개인의 삶과 세상은 여전히 의문과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겐 잃어버린 본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