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를 혁신해 금융산업에 새 판을 깔겠다. 플랫폼 금융을 활성화해 기존 금융사와 빅테크 간 경쟁을 유도하면 혁신이 일어나 새로운 경쟁의 장이 열릴 것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차 금융규제혁신회의를 주재하며 이렇게 말했다. 금융에 플랫폼을 접목해 소비자 편의성을 높이고 산업 혁신을 촉진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위한 자리였다.
규제 혁신은 윤석열정부 금융위가 초기부터 내세운 정책 방향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6월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규제를 풀어 방탄소년단(BTS) 같은 금융사가 탄생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금산 분리까지도 보완될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을 분리해 재벌기업이 은행을 사들여 사(私)금고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산 분리는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성역처럼 여겨졌다. 특히 2010년대 초·중반 동양그룹이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반 투자자들에게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등을 팔아 4만여명, 1조7000억원 규모의 피해를 냈던 ‘동양 사태’ 이후 매 정권은 금산 분리를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을 중심으로 한 주요 금융지주사가 수백조원을 굴리는 등 몸집을 키운 뒤에는 금산 분리가 되려 금융사의 사업 다각화를 막는 족쇄처럼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예금과 대출 금리 간 차이(예대금리차)에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금산 분리를 필두로 한 각종 규제 탓에 “한국 금융경쟁력은 우간다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이 금융위가 정부 출범 초기 규제 혁신에 주력한 배경이다. 지난 6월 은행 보험 증권 등 각 업종 협회·단체에 ‘풀고 싶은 규제를 가감 없이 전달해 달라’고 요청해 230여개 과제를 받은 뒤 이를 36개로 추렸다. 이날 회의 결과가 본격적인 규제 혁신의 첫걸음인 셈이다.
구체적인 회의 안건은 ‘빅테크(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의 온라인 금융상품 중개 허용’이다. 현재 빅테크는 대출상품에 한해서만 온라인 가격 비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데 이 범주를 보험, 예금, P2P(대출 수요자 대 공급자) 금융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이다. 현재 대출만 중개하는 토스, 핀다 등은 더 많은 금융 상품을 고객에게 추천할 수 있게 됐다.
대신 금융사에는 ‘플랫폼 업무 활성화’라는 당근을 줬다. 은행은 보험 증권 카드 등 계열사 서비스를 한꺼번에 제공할 수 있는 통합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보험사는 헬스케어 자회사를 설립해 개인이나 기업 대상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관련 상품·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팔 수 있다. 요양원 같은 시설도 직접 운영이 가능해진다.
오매불망 기다려온 규제 혁신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발표된 뒤 금융권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규제 혁신 방향인 ‘금융과 플랫폼의 접목’이 금융사 고객을 빅테크로 옮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미 보험업계에서는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상황이다. 한국보험대리점협회(협회)는 “빅테크가 보험상품을 팔 수 있게 되면 독립 보험대리점이 모조리 고사할 것”이라며 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인 22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불공정 경쟁 등 적지 않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인데도 권한을 가진 금융위가 업계 의견을 단 1회 수렴하고 마는 등 관련 절차를 주먹구구식으로 밟아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보험 판매 시장에서 빅테크 의존도가 높아지면 보험사에 더 많은 수수료를 요구, 결국 소비자 이익이 줄어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빅테크 업체들은 “대출상품 가격 비교 서비스는 이미 활발히 이용되고 있는데 보험은 안 된다는 협회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맞서는 상황이다. 현재 자동차보험 등 8개 범주의 보험 상품 가격을 비교할 수 있는 손해·생명보험협회 ‘보험다모아’ 서비스가 존재하지만 홍보가 부족해 널리 쓰이지 않고 있다. 보험상품 가격 비교·판매 중개 플랫폼이 출시되면 소비자 선택권이 늘어나고 편의성도 개선된다는 것이 빅테크 업체 측 주장이다. 수수료의 경우 “일어나지 않은 가정에 기반해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다른 금융사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득실 따지기에 한창이다. 업권별로 다른 혜택이 주어진 만큼 이해관계가 다른 상황이다. 특히 은행권의 경우 파급력이 큰 ‘비금융업 진출 허용’안이 빠져 실망스러운 표정이다. 보험업권에서는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헬스케어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빅테크의 상품 판매 시장 진출 허용이 부담스럽다.
익명을 요구한 은행권 관계자는 “금융사는 빅테크에 비해 IT 역량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금융의 플랫폼화에 초점을 맞춘 이번 규제 혁신을 마냥 반기기는 어렵다”면서 “이번 규제 혁신은 빅테크 업계 만족도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