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가라사대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와 터럭과 살갗을 함부로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 하셨거늘, 아무래도 엄마는 효도를 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어느 주말, 낄낄거리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내 얼굴을 애처로운 손길로 쓰다듬으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저기, 쌍꺼풀 수술 한번 해보면 어떨까? 그럼 훨씬 이뻐질 것 같은데.” 얼굴 뜯어고치겠다는 딸내미를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니면서 말리는 엄마는 봤어도 성형외과 가라고 등 떠미는 엄마는 또 처음 본다며 툴툴거리자 “아니, 그게 아니라 두껍게만 안 하면 괜찮지 않아? 티 안 나게 얇게 하자. 얇게!”라는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만일 외탁했더라면 성형 수술을 하느니 마느니 쓸데없는 승강이를 벌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얼굴은 연예인으로 따지자면 유호정, 김희애, 오연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애석하게도 최불암, 백일섭, 강호동과 사촌지간이라 해도 믿을 아빠의 유전자를, 그것도 듬뿍 물려받았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엄마와 닮은 구석이 없어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이라는 농담을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는 서글픈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엄마의 딸이 맞는다. 그렇지 않다면 아빠가 가지고 있지 않은 우둘투둘한 닭살과 삐뚤빼뚤한 아랫니와 뽀글뽀글한 곱슬머리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못난 부분만 물려준 엄마가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닭살은 옷으로 가리고 아랫니는 아랫입술로 가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곱슬머리만은 숨길 길이 없어 6개월에 한 번씩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며 살아왔다. 내 돈 내고 미용실에 가면서도 어찌나 눈치를 보게 되는지. 악성 곱슬머리라 시술이 쉽지 않겠다는 미용사의 한숨 섞인 말에 몹쓸 병을 진단받기라도 한 것처럼 번번이 작아지고야 만다. 모진 핍박을 이겨내며 머리를 펴더라도 라면에서 싸리 빗자루가 될 뿐, 타고난 직모의 자연스러운 찰랑거림을 따라갈 수는 없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점은 1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이 빨리도 돌아오는 것처럼 곱슬머리를 펴야 하는 날도 순식간에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을 생각만으로도 지긋지긋해진 나는, 뭐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를 떠올렸다. 뉴욕에 사는 작가인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다름 아닌 곱슬머리다. 드라마를 보며 작가의 꿈을 키울 적에 그녀의 머리도 언젠가는 따라 해 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래, 드디어 때가 왔구나! 곱슬곱슬 파마를 한 다음 그대로 두면 새로 자라나는 곱슬머리와 어우러져 스트레이트 파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여차하면 록밴드 들국화의 리드보컬인 전인권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하는 그의 노래를 주문처럼 외며 미용실로 향했다.
“많이 지저분해질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미용사가 강하게 만류했지만 전인권이 될 각오를 한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몇 시간 후 거울 속에는 캐리 브래드쇼도 전인권도 아닌 내가 앉아 있었다.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머리카락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싸리 빗자루보다는 외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후 이따금 머리를 자르기만 할 뿐 다른 시술은 하지 않았다. 억지로 곱슬곱슬하게 만들었던 부분은 이제 거의 잘려 나가고 자연 곱슬머리만 남았다. 미용사의 우려대로 내 머리는 깔끔하지 않다. 하지만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들꽃과 산등성이에 질서 없이 솟아난 나무가 그 자체로 아름답듯, 자연 그대로의 내 머리도 나름대로 매력을 지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이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한층 애처로워졌다. 심지어 아빠까지 덩달아 성화인 걸 보면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제일 곱다고 한다는 옛말은 아무래도 거짓인 모양이다. 머리를 자르든지 묶든지, 하여튼 간에 단정하게 좀 하고 다니라며 잔소리를 하는 통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다. “나는 자연인이야. 자꾸 귀찮게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산속으로 들어갈 테니까 그냥 내버려 두셔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에 엄마와 아빠가 콧방귀를 뀐다. 사실 비웃음을 살까 봐 한 글자를 빼놓고 말했다.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자연 미인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 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