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꿀벌의 이유

입력 2022-08-24 04:02

‘누군가 죽어서/ 밥이다// 더 많이 죽어서/ 반찬이다// 잘 살아야겠다.’ 이것은 내가 오래전에 쓴 ‘생명’이란 제목의 시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의 생명 위에서만 생명이다. 다른 생명의 희생을 담보로 한 산 제사요, 가건물 같은 것이다.

공기나 물을 제외한 무릇 음식은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서도 가능한 음식이 있다. 식물로부터 나오는 꿀이 그것이고 동물로부터 나오는 젖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도 가장 좋은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여기서 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본래 꿀은 꽃에 있었던 것이다. 덩어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걸 벌들이 모아서 꿀이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꿀을 가리켜 꽃꿀이라고 말하지 않고 벌꿀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인용해 나는 시를 설명하기도 한다.

시는 본래 독자들에게 있던 그 무엇이다. 그걸 알아차리고 그걸 모아서 언어로 표현해주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래서 시를 시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여기서 두 가지를 합의하고 넘어가야 한다. 시의 본래 주인이 독자들이었다는 것.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시를 돌려줘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시인과 꿀벌은 같은 사명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꿀벌의 덕성은 무엇인가? 왜 꿀벌이 꿀벌인가?

첫째로 꿀벌은 좋은 것, 필요한 것을 찾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탁월한 감식력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둘째로 꿀벌은 그렇게 찾고 구별하면서도 상대방을 해하지 않는다. 생명을 사랑하면서 보살펴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꿀벌은 부지런하다. 끝없이 노력해 쉬지 않고 무슨 일인가를 한다. 근면은 모든 성공의 모체와 같은 것이다. 넷째로 꿀벌은 모아두고 저축할 줄 안다. 어려운 시절을 대비하는 꿀벌만의 지혜라 할 것이다. 다섯째로 꿀벌은 다른 생명을 유익하게 한다. 나눠주고 다른 생명이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꿀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사점, 교훈은 선한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나누면서 선한 영향력을 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나의 재화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나의 재능과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세상은 의외로 단순해 ‘나’ 하나와 모든 다른 ‘너’로 구성돼 있다. 인생살이는 나와 너와의 관계지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 나 혼자서만 잘 사는 세상은 없다. 오로지 더불어 잘 사는 삶이다. 나 혼자만의 평안이나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오직 나 혼자만의 행복과 부유와 안일을 꿈꿀 때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우울하고 불안하고 불행하고 하루하루 따분한 인생인 것이다.

나는 요즘 “이제 우리는 타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봐야 할 때”라고 밝힌 전직 독일 여성 총리의 말에 많은 위로를 받고, 좋은 세상을 살아갈 희망의 끈을 발견한다. 그것이 또 실존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중심 사상인 ‘관심(Sarge)’과 연결된다고 본다. 나 혼자 잘 살고 편안하고 좋은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그걸 우리는 2년 반도 넘게 코로나19를 통해 배우기도 했다.

모든 세상의 앞서가는 사람들, 잘 사는 사람들, 많이 아는 사람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꿀벌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마땅히 꿀벌처럼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악덕이 된다. 혼자만 좋아서 자기만 아는 시를 쓰는 시인도 여기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나태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