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모든 대통령은 재건축·재개발을 좋아하지 않아요. (규제를) 풀면 집값이 뛰는데 정작 혜택은 자기 임기 이후에 나오니까….”
대선 전 여야 모두 재건축 규제 완화, 1기 신도시 재정비 등의 공약을 보따리처럼 풀 무렵 한 중앙부처 공무원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시에는 재개발·재건축 규제 완화가 ‘당연한 수순’처럼 취급받던 시기였기에 그다지 새겨듣진 않았다. 그러다 지난 16일 정부가 ‘국민 주거안정 실현방안’을 내놓은 걸 보고 이 말을 다시 떠올렸다.
정부는 향후 5년간 전국에 주택 27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며 연도별 목표 물량을 제시했고, 공공 아닌 민간이 공급한다는 점도 거듭 강조했다. 그런데 정작 민간 공급의 걸림돌로 지목되는 재건축 안전진단,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재초환),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등의 개선에 대해선 나중으로 미루거나 아예 계획조차 제시하지 않았다. 다이어트한다며 식이요법과 운동 계획은 잔뜩 내놓고 정작 헬스장 등록은 다음 달에 한다는 느낌이랄까.
법 개정 사안인 재초환은 개편을 장담할 수 없으니 그렇다 치지만 안전진단은 행정부 힘으로 개정할 수 있는데 이제야 검토를 착수한다 했다. 정부 출범 후 석 달간 뭘 했나.
대선뿐 아니라 지방선거 공약이었던 1기 신도시 재정비에 관해서는 보도자료 전체 46쪽 분량 중 달랑 4줄 언급돼 있다. ‘준공 후 약 30년이 지나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광역교통 및 기반시설 확충 등 종합적 도시 재정비가 필요하므로 올해 하반기 중 연구용역을 거쳐 2024년에 도시 재창조 수준으로 재정비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겠다’는 게 전부다. 해당 지역에서 반발이 일자 대통령실은 도시를 재창조하는 수준의 마스터플랜은 5년 이상 걸리는 게 일반적인데 1년6개월 정도로 줄인 거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누가 언제 도시를 재창조해 달라 그랬나. 그냥 아파트가 낡아가니까 다시 지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거 아니었나.
국토연구원이 낸 ‘1기 신도시 주택 소유자 인식조사’에 따르면 분당, 일산은 도시공원과 녹지환경에서 만족도가 비교적 높았다. 반면 출퇴근 부담과 주택 노후 부분에서 부정적 평가가 많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굳이 거창하게 ‘도시 재창조’ 하겠다고 뜸을 들이기보단 낡은 아파트를 다시 짓고 광역교통 체계를 보완하면 될 일 아닌가. 도시 재창조는 재정비의 결과지, 목표로 보기는 어렵다. 하필 2024년이란 일정표가 총선 일정과 맞물려 괜히 “총선 때 우려먹으려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것 아니냐”는 의심만 샀다.
물론 인플레 우려로 기준금리가 급등하면서 주택시장 수요가 꺾이는 등 사정이 달라졌으니 정책도 일부 달라질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주택 공급은 실제 효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금리 등 단기적 요인만 갖고 정책을 조절하려 들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가뜩이나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오르면서 건설사 사업성은 낮아지는데 주택 매수 수요까지 곤두박질쳤다. 집을 지은들 사려는 사람이 없으면 누가 집을 지으려 하겠나.
1기 신도시 문제는 더 심각하다. 당장 올해 재건축 연한 30년 이상 된 아파트가 전체 4분의 3, 약 25만 가구다. 1000가구 이상 대단지 아파트를 기준으로 무려 250개 단지가 재건축 가시권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현실적으로 이 많은 가구를 한꺼번에 재건축할 순 없으니 순서를 정하고 이주 대책도 세워야 할 텐데 이게 잘될지 모르겠다.
자칫 하세월하다 준공 50~60년 아파트가 속출할 수 있는 상황인데 2024년까지 계획을 만들겠다는 것도 한가해 보인다. 아무래도 이 문제가 본격 불거지는 건 윤석열정부 이후가 될 테니 굳이 지금 서두를 필요 있느냐, 오히려 개발 기대감을 선거 때마다 꾸준히 불어주면 선거에 유리하지 않겠나 하는 계산이 깔린 듯하다. 시장 상황보다 정치적 이익이 앞서는 모습, ‘가진 자’에 대한 질투를 이용해 ‘부동산 정치’를 했던 문재인정부 뒷모습이 오버랩된다면 과한 걸까.
이종선 경제부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