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을 잡고 소의 등에 탄 소년. 자세히 보니 앞발을 힘차게 내닫는 소의 하반신은 물고기처럼 꼬리지느러미가 있다. 실제 옆에는 작은 물고기가 헤엄쳐 다닌다. 가쁜 숨을 쉬며 달려온 소는 오리의 목에 입맞춤을 한다. 오리 옆에는 여인이 부끄러운 듯, 황홀한 듯 누워 있다.(이중섭, ‘상상의 동물과 사람들’, 1940)
겨우 9×14㎝ 크기 엽서화다. 이 작은 크기에 샤갈을 능가하는 초현실주의 화가 이중섭(1916~1956)의 면모가 빛난다. 샤갈의 그림이 남녀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정도라면 이 작품에선 짐승이면서 물고기인 환상적 동물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이 최근 개막했다. 전시는 지금까지 주류 미술로 취급받지 못한 엽서화를 대거 소개한 점, 이를 통해 신화적 상상력을 뻗치는 이중섭을 초현실주의자로 우리 앞에 새롭게 불러낸 점 등에서 이채롭다.
이중섭은 화면을 뚫고 뛰쳐나올 것 같은 황소 그림이 주는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야수파 화가로 각인된다. 지난해 7월부터 같은 장소에서 11개월간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전’에서도 이중섭 작품 중 소를 그린 명품 유화가 나왔다. 그때 전시가 대형 위주라면 이번에는 엽서화 편지화 은지화 등 작으면서도 주목해야 할 장르가 나왔다.
엽서화를 통해 이건희 컬렉션의 파워를 느낄 수 있다. 컬렉터 이건희의 수중에 들어간 뒤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엽서화 40점이 우르르 공개됐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20대 시절 88점의 엽서화를 그렸는데, 그중 45%를 컬렉터 이건희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엽서화 공개는 1986년 호암갤러리의 이중섭 30주기 전시 이후 처음이다.
이중섭은 1950년 월남한 이후의 작품 활동만 조명됐다.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43~50년 원산 시기에도 많은 작품을 제작했지만 피난하면서 작품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4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그린 엽서화는 40세에 요절한 이중섭의 20대 초기 화풍을 보여주는 창이다. 동시에 ‘사랑꾼 이중섭의 초상’이기도 하다. 평양과 원산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중섭은 36년 미술 유학을 가서 도쿄 문화학원에서 공부했다. 39년(23세) 한 해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조선 청년 이중섭은 연애편지 쓰듯 관제엽서 앞면에 그림을 그려서 연인 마사코에게 보냈다. 40년에 처음 우체통에 넣기 시작한 뒤 43년까지 88점을 보냈다.
엽서화는 ‘상상의 동물과 사람들’이 시사하듯 초현실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 이중섭은 자유미술가협회를 무대로 활동했는데, 이 단체는 초현실주의와 기하학, 추상미술 등 당시로선 급진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엽서화는 종이에 직접 선을 긋고 채색하거나 먹지를 눌러 선묘를 한 뒤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사람과 동물, 아이들을 소재로 하며 사람과 같은 크기의 큼지막한 과일을 따 먹는 사람들, 사람처럼 춤추는 말, 사람과 물고기가 같은 크기로 그려지는 등 신화적 상상력이 번득인다.
40년대 제작한 초기 연필화 4점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소와 여인’(1942)은 초현실주의자 이중섭을 잘 보여준다. 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 것으로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배를 드러낸 소와 허공을 응시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관능적 포즈의 여인이 엉겨 있다. 각각 자신과 훗날 아내가 될 마사코를 상징하는 듯 사랑의 기쁨이 화폭에 넘쳐난다. 마사코는 엽서화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79년 미공개작품 200점을 전시한 미도파화랑 ‘이중섭 작품전’에서 처음 공개했다.
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은 원산에서 아내와 두 살, 세 살 연년생 아들 둘을 데리고 월남했다. 초현실주의자 이중섭의 피는 제주도로 피난 갔을 때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온 가족이 걸어가며 맞은 첫눈의 기쁨을 담은 유화 ‘가족과 첫눈’(1950년대)에도 흐른다.
52년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부산 통영 대구 서울 등지를 돌며 작품활동을 하고 전시를 하며 가족을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일본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지에 그림을 그린 편지화에는 가족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는 가족과 재회하지 못한 채 무연고자로 세상을 떠났다. 내년 4월 23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