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따라 하늘로 난 길, 3색 사랑이 펼쳐지다

입력 2022-08-20 03:03 수정 2022-08-22 14:41
경남 함안군 손양원기념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둥근 외벽으로 손양원 목사의 소박한 삶, 이웃을 향한 사랑과 애국의 마음을 표현했다. 손 목사도 사용한 기념관 앞 우물이 눈길을 끈다. 함안=신석현 포토그래퍼

9개 기도문을 읽으며 길을 따라가니 물이 있는 수공간이 나오고 바로 옆 나지막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좁고 한 사람이 걷기엔 충분한 이 길은 어느새 공중으로 떠오르듯 위로 향한다. 그리고 달팽이 관처럼 둥근 길은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한 듯 높게 뻗은 시멘트벽에 둘러싸인다. 그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보이는 건 하늘뿐이고 어느새 길은 ‘사유의 공간’이 됐다.

경남 함안군 손양원기념관은 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간다. 묵상하며 걷던 원형의 길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삶을 생각하는 방으로 끌어들인다.

광복절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손양원기념관에서 만난 박유신 관장은 “손 목사는 여수에서 활동했지만 신앙의 기반은 태어난 이곳 함안”이라며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애국의 삶을 살고 한센인을 위해 사역한 건 모두 신앙에서 비롯됐다. 기념관이 함안에 자리한 이유”라고 말했다. 박 관장은 손 목사의 외손자다.

건축, 손양원 목사 삶을 담다

설계도면을 보면 둥근 구조의 기념관 절반은 전시 공간으로 쓰고, 절반은 물의 공간으로 비워뒀다. 코마건축 제공

손양원기념관은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왕복 8시간을 할애해 함안까지 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묵직한 콘크리트로 만든 이 기념관은 2015년 건립돼 2018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건축상을 받았고 2020년엔 미국 아키텍처 마스터 프라이즈(AMP) 건축상 문화건축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젝트로 선정됐다.

무엇이 이 건축물에 가치를 부여했을까. 기념관에 도착하기 전 이를 설계한 코마건축 이은석 경희대 교수에게 ‘꼭 봐야 할 부분’을 물었다.

이 교수는 “건축 의뢰를 받을 때부터 손 목사의 삶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했다”며 “그는 검소하게 살았고 남을 위해 희생하신 분이라 남겨둔 게 없다. 공간 자체에 손 목사의 삶을 느끼고 경험하도록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7가지를 꼽았다. 들린 건축을 통한 거룩한 볼룸, 원형 면을 통한 세속과 거룩의 분리, 좁은 길의 가치 경험 과정과 좁은 길을 통해 접근하면서 바라보는 푸른 하늘, 손 목사의 삶을 은유하는 세 개의 방이었다. 기획전시실과 수공간을 바라보며 묵상하는 공간도 눈여겨 봐야 했다.

9개 기도문을 따라가면 전시관으로 안내하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길의 높다란 외벽은 시선을 외부와 차단해 하늘만 보며 묵상하도록 한다. 함안=서윤경 기자

건축 소재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간 손 목사에게 적합한 노출 콘크리트를 썼다. 길이 되고 외벽이 되는 원형은 각자의 해석을 부여했다.

박 관장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 목사 별칭을 연결했다. 그는 “원자 폭탄이 터질 때 버섯구름 모양과 연결했다”고 전했다.

설계자인 이 교수는 모세와 손 목사를 연결했다. 이 교수는 “호렙산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간 모세에게서 일반적인 삶을 살지 않았던 손 목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범인과 다른 삶을 살았던 손 목사를 끊김 없는 원형으로 연결했다”고 설명했다.

둥근 외벽 안 절반은 3개의 큐브가 차지하며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나머지 절반 수공간은 열린 하늘과 함께 중정이 된다. 함안=서윤경 기자

원형의 외벽은 건축물을 둘러싸며 다양한 역할을 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되는 동시에 원형의 절반을 비워두면서 중정을 만들었다. 1층의 비워진 공간은 물로 채웠고 2층은 하늘에 양보했다. 자연스럽게 묵직한 콘크리트 건축이 하늘로 들린 듯 보였다.

원형의 길을 오르면 자연스럽게 2층 내부 공간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다. 그리고 원형의 나머지 공간을 차지한 3개의 정육면체 큐브로 연결된다. 큐브는 바로 3개의 방이다. 각 방은 테마에 맞춰 구성했다.

첫 번째 ‘나라사랑’ 방은 백의민족을 의미하는 하얀 색, ‘사람사랑’ 방의 벽면은 한센인의 피부를 나타내기 위해 돌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센인의 아픔을 느끼도록 바닥도 거친 돌로 마감하려고 했지만 관람객들의 편의를 고려해 마루 바닥으로 마감했다.

‘나라사랑’ ‘사람사랑’ ‘하늘사랑’ 등 3개 방은 손양원 목사의 삶을 색으로 표현한 전시공간. 하늘사랑방은 보혈을 뜻하는 붉은 색이다. 함안=신석현 포토그래퍼

마지막 ‘하늘사랑’ 방은 1, 2층을 관통하며 붉은색으로 표현했다. 이 교수는 “순교의 피를 은유한다. 천창에서 들어오는 빛은 붉은 벽을 타고 내려가 1층에 있는 손 목사와 두 아들의 검은 색 관으로 연결된다”면서 “각 방은 추상화된 공간을 통해 그들의 삶을 추억하도록 했고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설명했다.

손양원 목사의 삶, 콘텐츠가 되다

만년필 하나, 책 한 권 남긴 게 없지만 전시할 내용은 많았다. 손 목사의 삶이다.

나라사랑방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청주 교도소 독방에 갇혔던 손 목사 모습을 재현했다. 감옥 안에서 아버지와 아내, 아들에게 보낸 편지도 전시했다.

함안군 소속 이상현 학예사는 “손 목사의 편지에선 그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다”며 “큰아들 동인에게는 할 말이 많은 듯 비싼 종이에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썼고 반대로 아버지에겐 노안인 점을 감안해 큰 글씨로 썼다”고 설명했다.

사람사랑방은 애양원에서 만난 한센병 환자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손 목사가 입으로 고름을 짜낸 한센인 발도 보인다. 손 목사는 평양장로신학교 졸업 후 여수 애양원에 부임해 장갑도 끼지 않은 채 한센병 환자와 악수하고 식사도 함께했다.

3개의 방 뒤편 ‘생가 이야기’라는 이름의 방도 있다. 손 목사가 ‘사랑의 원자탄’의 삶을 사는 데 영향을 준 4명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 주기철 목사 그리고 호주에서 온 프레더릭 맥크레이(한국명 맹호은) 선교사와 제임스 노블 매겐지(한국명 매견시) 선교사다.

박 관장은 “신사참배를 반대해 퇴학당한 손 목사의 결단은 칠원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르고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아버지의 삶과 연결된다”며 “주기철 목사는 그에게 순교의 정신을 알려주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맹호은 선교사를 통해 손 목사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안게 됐고 매견시 선교사가 있는 부산 상애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도운 뒤 애양원에서 헌신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2층에서 시작돼 1층으로 연결되는 하늘사랑방은 손 목사와 큰아들 동인, 작은아들 동신의 관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나란히 놓여 있다. 두 아들은 1948년 여순사건 때 좌익 단원에게 총살당했다. 기념관 2층으로 안내하는 길 앞 9개의 기도문은 바로 손 목사가 두 아들의 장례식 때 읽은 감사 기도다. 순교의 자식이 나왔음에, 보배 같은 성도들을 맡겨주셨음에, 한 아들도 아닌 두 아들을 순교하게 했음에 감사하는 기도문이다.

하늘사랑방 옆으로는 캐나다 교포인 최미정 화백의 작품 다섯 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하늘 문이 열리고’는 길이 7m의 대형 화폭에 손 목사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애양원 사역, 순교한 손 목사의 장례행렬 그리고 천국 입성이 담겨 있다.

콘텐츠는 기념관 외부로도 연결된다. 기념관 바로 앞에 재현된 손 목사 생가다. 손 목사가 7살 때부터 다녔던 칠원교회는 개사육장이 된 손 목사 생가터를 구입해 함안군에 기부했고 이곳에 생가를 복원했다. 그 앞에 있는 우물은 복원된 게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용은 하지 않지만 물이 나온다.

콘텐츠를 쌓는 데 함안군과 국가도 힘을 보탰다. 건축할 때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인 기념관을 짓기 위해 함안군은 29억7000만원을 지원했고 국가와 경상남도도 각각 11억7000만원, 8억6000만원을 투입했다. 함안군은 위탁 운영 중인 기념사업회에 매년 1억 5000여만원의 운영비를 주고 있다.

함안군은 20일까지 ‘세상을 보듬은 세 가지 사랑’ 캠페인도 진행했다. 함안에 있는 손양원기념관과 몽골에서 활동한 이태준 열사 기념관, 127년 역사를 가진 함안지역 최초 교회인 사촌교회를 둘러보는 종교문화여행 순례 프로그램이다. 이영학 함안군 복지환경국장은 “함안은 손 목사와 이태준 열사의 독립운동 시작점”이라며 “현재 설계 단계인 함안독립운동기념관이 완공되면 애국지사, 6 25전쟁 등 역사를 연결해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함안=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