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시민 품에 안긴 광장

입력 2022-08-04 04:02

광장은 많은 사람이 모이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아고라를 기원으로 한다. 광장이 현대적 개념으로 발전한 곳은 유럽이다. 유럽에선 도시를 재정비할 때 광장을 복원하거나 신설하는 것을 주요 사업에 포함시킨다. 시민들에게 걷거나 쉴 수 있고 문화 중심지로서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광장의 요건이 딱히 정해진 건 아니다. 다만 도시의 상징적인 곳, 중요한 곳, 시민들이 모이기 쉬운 곳에 있고 독립적이지 않으면서 도시의 다른 곳과 연결된 공간이어야 한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대표적인 광장은 광화문광장이다. 광화문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있었지만 여기에 광장이라는 단어가 붙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오랜 기간 광장 문화가 이어져 왔던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광장의 개념이 없었다. 조선시대 정궁이던 경복궁의 광화문 앞길은 육조 거리, 궁궐 앞길로 불렸다. 다만 육조 거리에서 유생들이 모여 상소를 올리거나 시위를 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 광장 역할은 했던 셈이다.

광화문광장엔 일제 강점기 오욕의 역사가 묻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행정적으로 편리한 장소를 택한다는 명분으로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터에 만들어버렸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해체해 동쪽 경복궁 건춘문 옆으로 이전시켰다. 일제는 이후 광화문이 있던 원래 자리를 총독부광장 또는 광화문통이라 부르면서 관제 행사를 주로 치렀다. 이곳은 해방 이후 중앙청 광장으로 불렸다. 광화문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은 1968년이었다.

광화문광장이 현재 모습을 갖춘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왕복 20차로 세종대로를 2009년 대폭 줄이면서 조성했으니 1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광장은 도심 공원 역할도 해야 하지만 당시 광화문광장은 접근성 면에선 효율적이지 못했다.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만들어서다. 광화문광장은 정치적 목소리의 분출 장소로 작용했다. 광우병 파동 촛불집회, 세월호 참사 집회,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 조국 법무부 장관 퇴진 집회가 대규모로 열렸다. 광장 사용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계속되기도 했다.

그랬던 광화문광장이 몇 년간의 재구조화 사업을 마치고 이번 주말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은 박원순 전 시장이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오세훈 시장은 사업을 반대했지만 취임 후엔 보완·발전시키는 쪽으로 결론 냈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섬처럼 동떨어졌던 예전과는 달리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붙은 측면 광장이 됐다. 면적은 기존보다 배 이상 넓어졌고, 녹지 역시 3배 이상 늘어났다. 나무를 많이 심어 그늘도 만들어졌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을 공원처럼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대규모 문화행사는 위원회나 자문회의를 거쳐 사용 허가를 결정하고, 허가 내용 이외의 행위를 했을 때는 광장 사용을 제한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번엔 광화문광장에 역사적, 전통적, 문화적 가치를 크게 부여했다는 점이다. 공사 도중 발굴된 세종로공원 앞 사헌부 문 터는 전시장으로 구성되고, 우물과 배수로 등 유구(遺構) 일부는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관람할 수 있다.

광화문 월대(月臺)도 내년까지 복원될 예정이다. 월대는 넓은 기단으로, 왕과 백성이 소통하던 공간이었지만 1920년 일제에 의해 훼손됐다. 얼마 전 서울 종묘와 창경궁 연결 통로가 90년 만에 복원돼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다. 역사와 전통의 가치 회복을 내건 새로운 광화문광장 역시 시민들이 함께 쉬고 거닐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오롯이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남혁상 사회2부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