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살고 싶은 ‘지역’이 자꾸만 늘어나네

입력 2022-07-29 04:05

서울에서만 3대 넘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 그게 나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수학여행을 가면서 처음으로 열차를 타봤다. 대학교에 갔더니 사투리 쓰는 지역 출신 친구들이 많았다. 무심코 “언제 시골 내려갈 거냐?”고 묻다가 핀잔을 먹곤 했다. 옆 동네 사는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도통 서울을 벗어날 일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한 아파트에서만 19년 넘게 살고 있으니! 텃밭이 딸린 작은 시골집을 사면서 간신히 경기도로 생활 반경을 넓혔다. 그래 봤자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여서 여전히 내 모든 일과 관심 분야, 인간관계는 서울로만 집중됐다.

지역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 커다란 계기가 생겼다. 서울에 유수한 출판사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나는 그런 회사에서만 일해온 편집자 출신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첫 책 ‘마녀체력’을 ‘남해의봄날’에서 출간했다. 설마 진짜 그 남해냐고? 그렇다. 서울에서 300㎞도 넘게 떨어진 남쪽 끝 통영에 있다. 후배가 출판사를 하겠다고 의논할 때만 해도 “거기서 책을 내다간 굶어 죽을 거”라고 막말을 했는데 말이다.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나는 엉터리 점괘를 남발한 사이비 점쟁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굶어 죽기는커녕 후배는 신선한 물고기를 많이 먹어 토실토실해졌다. 이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손바닥만 한 서점 ‘봄날의책방’은 통영을 찾는 관광객들의 명소가 됐다. 도시를 탈출한 용기 있고 재주 많은 이웃이 하나둘 옆에 정착하면서 그 지역은 더욱 근사해졌다. 얼마 전에는 1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많은 작가와 독자들을 오히려 통영으로 불러 모았다. 덕분에 해상 택시를 타고 탁 트인 바다로 나가 하늘이 복숭아 빛으로 변해 가는 마술을 만끽했다. ‘더 늦기 전에, 매일 이런 놀을 보면서 살고 싶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던가.

비단 통영뿐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동네 책방 북토크를 하면서 차도녀의 망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나고 자란 서울에서 죽을 때까지 사는 걸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들여다볼수록 알게 된다고 했던가. 내 발로 돌아다니고 눈으로 살펴보니 참, 세상은 넓고 살고 싶은 곳은 많더라. 평생을 복잡하고 시끄러운 서울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불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어서는 일하느라, 가정을 꾸리고 나면 아이들 교육 때문에 옮길 생각을 못한다. 정작 일과 육아에서 자유로워지는 나이가 되면, 이번엔 용기가 나지 않아서 꼼짝 못하고 마는 게 ‘서울 쥐’의 신세다.

질기게 사투리를 쓰던 대학 동기 중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있다. 졸업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사는 모습이 어떤가. 엄청나게 출세하지는 못했어도 확실히 삶의 질은 높아 보인다. 여전히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살며 얼굴 볼 시간도 없는 서울 친구들에 비해 느긋하고 화통하달까. 최근에는 일산 아파트를 팔고 강릉에 정착한 선배를 만나러 갔다. 삼면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부부는 각자 근사한 서재를 꾸미고 일했다. 매일 맨발로 산책한다는 소나무 숲이며, 하루 종일 물멍을 해도 질리지 않는 바닷가가 코앞이었다. 생각을 바꾸고 용기를 내면 중년에도 일상이 바뀔 수 있다는 걸 목격했다.

마침 출판계에서도 반가운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고성, 옥천, 대전, 순천, 통영에 자리 잡은 다섯 곳 출판사가 지역색을 살린 ‘어딘가에는 OO이 있다’ 시리즈를 동시에 펴냈다. 서울 등 수도권이 아닌 데서도 삶을 우아하고 당당하게 꾸려 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야심 찬 공동 기획이다. 북토크도 각각 지역에 있는 동네 책방에서 한다니 오히려 서울에 사는 독자들이 아쉬울 판이다.

큰일 났네. 몸은 하나이고 남은 시간은 길지 않은데, 살고 싶은 지역 리스트가 자꾸만 늘어난다. 하긴 돌아다니면서 몇 년씩 죄다 살아 보면 되지. 그러다 출판사를 차려 ‘지역 쥐’의 삶을 예찬하는 편집자로 부활할지 누가 알랴.

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