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세종을 떠나며

입력 2022-07-28 04:08

그해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제설차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대다수는 차를 버리고 걸어서 퇴근했고, 낭만을 아는 어떤 이들은 창고에 있던 스키를 꺼내 타고 출근했다. 갓 태동한 세종이 고향인 이는 없었기에 우리(우리라고 해봤자 공무원과 기자들이었지만)는 모두 타향 사람이었다. 처음 생긴 마을이라 해서 ‘첫마을’로 이름 지어진 세종시 유일의 아파트단지에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모여 온기를 나눴다. 2012년 12월, ‘세베리아’(세종+시베리아)라고 불렸던 세종시 초기의 풍경이다.

당시 3만명도 안 됐던 세종시 인구는 10년이 지난 지금 5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밥집이 없어 아파트 공사 현장 옆 함바집에서 끼니를 때우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세종 맛집’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수백개가 나온다.

파견근무로 10년을 세종에서 살다가 이틀 뒤 서울로 이사를 하려 하니 세종시가 마치 ‘제2의 고향’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세종 첫마을 아파트에서 처음 자던 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자리가 바뀐 낯섦 때문이 아니라 밤새 울어대던 개구리와 두꺼비의 합창 때문이었다.

세종시의 정식 명칭은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줄여서 행복도시라고 한다. 초기에는 행복도시가 반어법처럼 느껴졌다. 곳곳이 아파트 공사판이었고, 대중교통은 전무했다. 그 흔한 대형마트 하나 없었고,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대전 병원으로 가야 했다. 세 살 딸아이는 아파트 창밖으로 놀이터를 쳐다보다가 자기 또래 아이가 하나라도 보일라치면 뛰어나갔다. 사람을 보기 힘든 도시였다.

그랬던 세종시가 서서히 인프라를 갖추면서 지금은 아주 살만한 도시로 변신했다. 처음 스타벅스가 생겼을 때 100m 가까이 줄을 섰던 풍경이 신문에 나왔는데, 지금은 10곳이 넘는다. 대학병원도 들어섰다. 세종 영재고와 예술고, 과학고까지 생겨 서울에서 세종으로 오는 유학생까지 생겼다. 처음엔 유배온 것처럼 우울해하던 아내도 세종 예찬론자가 됐다.

그렇게 정들었던 세종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려 하니 곳곳에 난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세종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안락한 주거 공간을 마련하자니 세종보다 3~4배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세종서 듣던 개구리와 두꺼비 소리 대신 취객의 고성이 들렸다. 나름 서울에서 괜찮다고 하는 동네를 골랐는데 초등학생 딸은 동네 구경을 한번 하더니, 세종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 했던 공무원들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서울 파견 근무를 꺼리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내려온 일부 부모가 “세종시 학교는 너무 공부를 안 시킨다”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내 자녀를 비롯한 대다수 학생은 대치동과 목동 같은 학원 셔틀에서 자유롭다. 출퇴근 시간은 아무리 많아도 하루에 1시간 이내에 해결되기에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기에도 좋은 환경이다.

주저리주저리 세종 찬가를 부르는 까닭은 거창하게 말하면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세종시 같은 도시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이고, 작게 말하면 평범한 가족의 행복 조건을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정부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개혁을 강조하고, 부동산 안정책을 내놓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심이 많은 것을 꼽으라면 교육과 부동산 정책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떻게 하면 국민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할 때 세종시에서 단 며칠이라도 살아보면서 교육과 부동산 문제 해법의 단초를 찾았으면 한다. 정든 세종시를 떠나며 문득 든 생각이다.

이성규 경제부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