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잊고 있던 인플레이션 공포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1970년대를 살아보지 않은 세대에겐 6% 물가 상승도, 인플레이션이란 용어도 익숙지 않지만 세계는 지금 연달아 ‘빅스텝’ 금리인상을 단행하며 물가잡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7월 0.5% 금리인상을 발표하면서 물가가 6% 이하로 잡히지 않는다면 성장과 고용을 희생하더라도 추가 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스태그플레이션이나 심각한 경기 침체의 가능성보다는 연말쯤이면 물가도 꺾이고 연간 성장률도 2% 중반에 이르는 연착륙을 전망했다. 그의 기대대로 연착륙이 가능하려면 수입 물가와 환율의 안정 등 외부 변수뿐 아니라 임금 안정이 필수적이다.
세계가 지금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의 악몽을 떠올리는 이유는 최근 큰 폭의 물가상승이 40여년 만의 일인 데다, 이것이 임금을 더욱 끌어올려 임금 인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경제학자가 최근의 물가 상승이 임금 때문이라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노동조합이 물가를 위협할 정도로 임금을 끌어올리지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 30여년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를 지나며 주요 선진국의 노동조합은 조직력이 크게 약화돼 실질임금의 하락을 막기도 벅차했다.
조금은 비극적 현실이지만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3% 임금인상을 촉구하는 ‘관제 춘투’를 벌이고 있다. 정부의 임금인상 압력은 지난 10년 동안 아베노믹스의 단골 메뉴였을 정도로 일본 노조는 존재감이 없다. 미국의 노사관계 사정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의 공개 응원까지 받아 가며 아마존이나 스타벅스 등에서 노조 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에피소드일 뿐이다. 민간 부문 노조는 조직률이 6%에 불과해 임금 인플레를 촉발할 정도의 시장 지배력이 없다. 노조가 힘을 잃으며 필립스커브나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정책적 관심도 낮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임금 상승 압력은 노조의 공세 때문이 아니라 팬데믹 시기의 고용 충격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데다 근로자들의 노동 기피 현상까지 겹쳐 일부 업종에서 발생한 구인난 때문이라는 평가다.
그렇다고 노동조합 변수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다. 영국과 독일, 한국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은 치솟는 물가에 ‘불만의 여름’을 보내고 있는 데다가 철도와 보건의료, 교육 등 공공서비스 노조들이 임금인상을 위해 파업을 불사할 태세고 겨울철 에너지 가격 동향에 따라 이 압력은 더욱 거세질 수 있다. 독일은 아예 1970년대의 ‘협력 행동(concerted action)’ 매뉴얼을 다시 꺼내 들었다. 7월 초 올라프 숄츠 총리는 노사 대표를 만나 물가와 임금의 동반 상승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협력을 다짐했다.
우리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하다. 지난 5년간 노조는 몸집을 크게 불려 조합원이 300만명에 육박하고 2020년부터 판교 빅테크 기업에까지 노조 열풍이 불고 있다. 더구나 글로벌 대기업들은 잇달아 최대 수익에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빅테크 기업들도 기술 인력 확보 차원에서 경쟁적인 임금 인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지난달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단을 만나 임금인상 자제를 당부한 것은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덕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곧이어 2023년 최저임금은 5% 선에서 결정됐고 현대자동차의 임금협상도 파업 없이 타결됐다. 올해 임금 투쟁의 큰 고비는 넘긴 셈이다.
이제 남은 불안 요인은 세 가지다. 우선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파업으로 드러났듯이 비정규직과 공공부문 공무직, 플랫폼 노동과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의 요구가 돌출적으로 폭발할 때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하반기 민주노총의 투쟁은 이런 사각지대 불안정 근로 계층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 맞춰질 것이다. 둘째는 대면 서비스업이나 농어촌, 중소 제조업 등 저임금 업종에서 확대되는 인력난 문제다. 이는 한계기업의 퇴출과 구조조정, 생산성과 임금의 상승을 가능케 하지만 생활물가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정책 당국이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점차 높아지는 기대 인플레이션 지수가 서비스 가격과 내년 임금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비한 정부와 노사단체의 긴밀한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시기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